내 안의 가부장-여성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시드라 레비 스톤 지음, 백윤영미·이정규 옮김/사우·1만6000원
31살 여성 알마는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업가다. 개인 생활은 제쳐두고 일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을 만큼 열정적이고, 알마의 부모는 그를 언제나 든든하게 지지해왔다. 알마는 실제로 많은 돈을 벌고 있지만 자신을 “실패자”라고 했다. “남자를 못 만나고 관계 유지를 못 한다”는 사실 때문에 “삶에서 이룬 어떤 것도 내겐 전혀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남자와 사귀게 되면 나는 남자 오른쪽에서 한 발짝 정도 뒤처져서 걷기를 바랍니다. 절대 나란히 걷거나 대등해지고 싶어 하는 듯한 느낌을 줘서는 안 돼요.” “여자라면 아내가 되어야만 합니다. 중요한 건 남자의 일이지요.”
나이키는 최근 여성들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맞닥뜨리는 편견을 담아낸 ‘더 미치도록 꿈꿔라’(Dream Crazier) 광고를 선보여 많은 여성의 공감을 얻었다. 나이키 누리집 갈무리
놀랍게도 알마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왔다. 자신 안의 ‘가부장적인 자아’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비단 그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은 “여성이 객관적이지 못한 탓에 안전하지 않다고 확신하면서도 냉철한 객관성은 여성답지 않다”는 식의 가부장적인 관념을 내재화하고 있다고, 책 <내 안의 가부장>은 말한다.
저자인 시드라 레비 스톤은 여성에 대한 편견이 이중으로 작동해왔다고 설명한다. 6000년 동안 견고하게 사회를 지탱해 온 가부장제가 한 축이라면 다른 하나는 여성 스스로가 내면화한 가부장적인 자아다. ‘내면 가부장’이란 이 자아 때문에 여성들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가부장제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여성 자신도 얼마든지 미소지니(여성혐오)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저자는 40년 동안 심리치료사로 활동해 온 이력을 살려 다양한 여성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내면 가부장’의 개념을 보여준다. ‘내면 가부장’을 자각한 이들의 무의식은 사실 이렇다.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남성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선 ‘남성보다는 조금 못한’ 존재가 돼야 하고, 남녀가 평등하다고 생각하지만 내심 여자 의사나 변호사보단 남자를 더 신뢰해 그들을 찾는다. 남성과 함께 있는 게 더 안전하고 ‘힘이 있는 자리’에 여성이 있어선 안 된다고도 생각한다.
이 가부장적인 자아가 지향하는 건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답다’고 명확하게 정의된 젠더 역할이다. 즉, 좋은 여성이라면 남을 잘 돕고, 수용적이고, 사랑이 넘치며, 베풀기를 좋아하고, 공감을 잘하며, 이해심이 많고 양육을 잘해야 한다.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일종의 죄책감을 느낀다거나 자신도 모르게 “여자들은…” “여자라면…”이란 말을 반복하고 있다면, 내 안의 ‘가부장’ 자아가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이 자아가 여성을 통제하는 무의식적인 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최소한 남자의 몸을 하고 있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는 외부의 가부장제와 달리 내면의 이 자아는 무의식 속에서 의식을 통제하기 때문에 사실 그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조차 어렵다.
순응하거나 반항하거나 도망가거나. 그동안 여성들이 ‘내면 가부장’ 자아에 대응하는 방식은 대개 이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저자는 일단 이 자아의 존재를 인식한 뒤에 이를 ‘자문가’로 삼자고 제안한다. “맹목적으로 순응할 필요도, (반대로) 거부할 필요도 없”고 “그에 맞서 싸우느라 불안해하거나 불편을 느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자아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협력할 때,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틀을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다만 여러 자아를 통합하거나 균형을 맞춰 새로운 ‘에고’를 만들어내자고 설명하는 부분은 관념적이고 현학적으로 다가와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내 안의 ‘가부장 코르셋’을 찾고 싶다면, 이 책은 꽤 친절한 가이드 역할을 한다. 저자는 권력, 관계, 섹슈얼리티, 감정 등 다양한 측면에서 가부장 자아를 탐구하고 반대로 이 자아와 균형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가모장’ 자아 등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저자와 상담했던 수많은 여성의 목소리에 자신을 비춰보며 스스로 묻고 답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하지 않을까. “외부에 존재하는 가부장제의 의견과 판단과 가치를 반영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자각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적을 효율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저자의 말처럼, 내 자아의 ‘탈코르셋’은 지피지기에서 시작될 테니 말이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