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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린 싼 전기의 유혹 떨칠 수 있을까

등록 2019-03-22 06:00수정 2019-03-22 20:04

사회학자가 그려낸 ‘입체적’ 원전 역사
제한송전과 석유파동으로 원전 도입
국산화·표준화로 기술추적에 성공
“탈핵에너지 전환은 근본적 변화 요구”
한국 원자력발전 사회기술체제-기술, 제도, 사회운동의 공동구성
홍덕화 지음/한울아카데미·4만5000원

그동안 원자력발전을 보는 시각은 극단적으로 갈렸다. 친원전 진영에선 ‘후발추격국 중 유일하게 원전을 국산화하고 수출까지 이룬 성공 신화’만 부각해왔다. 반대로 반핵운동 진영에선 원전 제도 내부의 갈등과 역동엔 관심이 없이 ‘부정한 동맹’, ‘원전 마피아’로만 치부하며 이를 타개할 활동만을 기록했다.

이런 상황에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인 홍덕화 충북대 조교수(사회학과)가 쓴 <한국 원자력발전 사회기술체제>는 눈에 띈다. 그는 원전 기술의 발전과 제도의 변화, 반핵운동의 영향을 폭넓게 시야에 넣으며 한국 원자력발전의 사회기술체계가 어떻게 형성돼왔는지 그 역사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원전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역사적 지평 위에 섰을 때, 탈핵에너지 전환 정책의 성과와 한계를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국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를 시찰하고 있다. 앞에 놓인 원통형 기계는 원자로의 축소 모형인 것으로 보인다. 출처 국가기록원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국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를 시찰하고 있다. 앞에 놓인 원통형 기계는 원자로의 축소 모형인 것으로 보인다. 출처 국가기록원
이 책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상업용 원전 건설 계획을 세운 1967년을 시작으로 한다.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인한 전력 수요의 증가와 1973년 1차 석유 파동은 석유발전 외에 다른 방식을 찾도록 압력을 가중했다. 1978년 최초의 원전인 고리 1호기가 지어졌을 때 원자력발전은 값싸고 공해가 없는 에너지이자 과학 발전의 상징, 즉 “민족중흥의 횃불”로 받아들여졌다.

정부가 원자력발전에 뛰어든 배경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핵무기 개발이었다. 1970년 주한미군 감축 결정으로 안보 위기가 불거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비밀리에 외국의 한국인 전문가들을 접촉하고, 프랑스로부터 핵무기를 제작할 수 있는 재처리 시설 수입을 추진했다. 하지만 미국이 막아섰다. 한국이 핵기술을 확보하면 주변국들의 핵무기 개발을 연쇄적으로 추동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미국의 전방위적 압박에 박 대통령은 1976년 비밀 핵무기 개발 계획인 ‘프로젝트 890’을 잠정 중단했다. 박 대통령은 우회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계속 추진했지만, 그의 사망 이후 개발은 중단된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미국의 핵무기 비확산 전략에 순응해 원자력의 군사적 활용을 포기한다. 대신 안정적인 전력공급이란 목표에 주력한다. 지은이는 1980~86년의 두 번째 시기를 한전을 중심으로 한 ‘전력공기업집단의 형성과 원전체제의 안정화 시기’로 정리한다. 한전으로 수직계열화가 이뤄지면서 원전의 추진력이 강화됐고, 이를 바탕으로 원전의 국산화와 표준화가 이뤄진다. 이 시기에 유념할 점은 “전력공기업집단이 주도하는 독특한 원전 산업구조는 합리적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 연구개발, 설비제작, 전력공급 부문 간의 경합으로 인한 국가계획 실패의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계획 실패로 인해 기술추격의 경로가 확정되고 발전주의적 에너지 공공성이 확립될 수 있었다.

울산 울주군 서생면에 있는 돔 형태의 신고리 3, 4호기의 모습. 울산/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울산 울주군 서생면에 있는 돔 형태의 신고리 3, 4호기의 모습. 울산/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전력 생산의 공기업화는 전기가격을 왜곡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80년대 후반 발전소들이 지나치게 많이 지어져 전력이 남아돌자, 정부는 전기요금을 수차례 인하하고 누진제를 완화했다. 컬러텔레비전과 냉장고, 세탁기 등이 대부분 가구에 보급된 데 맞춰 가정용 전력 사용량도 증가했다. 값싼 전기료는 원전체제에 대한 사회적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지렛대가 됐다. 하지만 지은이는 “이런 공공성의 실현은 공론장과 시민성, 생태적 지속가능성 등 다른 요소들이 누락된 ‘발전주의적’ 에너지 공공성이라는 단서를 달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같은 시기 민주화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반핵운동도 서서히 확산하기 시작했다. 지역 반핵운동은 1985년 영광군 홍농읍 주민들이 원전으로 인한 어업과 관광업 손실 보상을 요청한 것이 효시였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서 환경단체들도 원전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시작했다. 영광, 고리, 월성 등 원전 위치 지역주민들의 피해 보상 운동과 신규 시설 입지 반대 운동이 본격화했다.

1997~2010년 시기 전력 공기업 집단은 외환위기로 인한 시장화의 압력에 직면했다. 하지만 공기업의 값싼 전기 공급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여전히 높았기에, 대기업의 민자발전을 허용해주는 수준에서 시장화의 파고를 이겨냈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대 후반 한국은 독자적인 원전모델을 건설하고, 원전 수출을 성사시킨다.

‘원자력 르네상스’가 도래할 것으로 기대했던 원전 산업계는 2011년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라는 중대한 도전에 맞닥뜨린다. 2016년 경주 지진과 문재인 정부의 탈핵 선언으로 원전 체제 논쟁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위기 혹은 기회는 원전 시장의 전망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데 있다. 재생에너지와 천연가스의 경제성이 크게 향상돼 원전의 경쟁력이 줄어들면서 선진국의 전력시장에서 점차 자리를 잃고 있다. 독일처럼 탈핵에너지 전환의 길을 선택한 국가들도 속속 생기고 있다.

2017년 8월 한국원자력연구원 지하처분연구시설의 모습.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2017년 8월 한국원자력연구원 지하처분연구시설의 모습.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탈핵에너지 전환은 오랜 기간 형성되어온 사회기술체제를 전환해야 하는 문제이기에 대체에너지 발전을 늘린다고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싼 전기요금에 익숙해진 국민들은 원전 체계에 이미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 그렇기에 홍 교수는 탈핵에너지 전환이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낯선 실험들과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여름 폭염으로 인한 전력수요 증가는 휴가를 더 길게 가는 방법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와 같은 것들 말이다. “다른 생산 방식, 다른 생활 양식이 계속 에너지 전환의 우산 속에서 논의되고 실험될 때, 탈핵에너지 전환을 이끌어갈 전환의 사회적 기반이 탄탄하게 구축될 수 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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