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하고 귀여운 여자가 집안에 얌전하게 앉아서 등산하고 돌아오는 남자를 기다리는 모습은 이제 남자들 머릿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에요.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내 의지로, 내 발로 가려는 여성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여자들의 등산일기>(비채) 한국어판 발간을 맞아 2016년에 이어 두번째로 방한한 미나토 가나에(46) 작가를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북촌로에서 만났다. 밝고 환하게 웃는 그는 도저히 잔혹 범죄, 사적 복수, 존속살해 같은 이야기를 다루는 ‘이야미스(‘싫다’는 뜻의 ‘이야다’와 ‘미스터리’의 합성어)의 여왕’으로 보이지 않았다. 사법적으로 처벌이 불가능한 촉법소년 살인사건을 그린 데뷔작 <고백>은 2008년 일본에서 발간된 뒤 350만부가 팔려나갔고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국내에서는 20만부가 팔린 <고백>(2009)을 포함해 모두 16종의 소설이 번역돼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고 있다.
“독한 작품을 읽고 나서 느껴지는 찝찝함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고, 그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이야미스의 여왕’이라는 별명에는 감사한 마음이에요. 다만 무서워서 저의 소설을 그만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분이라면 독기 뺀 이번 책을 읽어달라고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여자들의…>는 등산하는 30~40대 여성들의 아픔과 회복을 다룬 ‘착한 성장소설’이다. 결혼할까 말까 갈등하거나 남자친구와 헤어지거나, 이혼 제안을 받는 등 제각각 고민을 안고 산을 타는 여자들의 여덟 가지 이야기가 맞물려 사슬 엮듯 이어진다. 기존의 독한 미스터리 소설과 달리 이번 책에서는 아무도 다치거나 희생당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대자연 속에서 서로 엉킨 감정과 오해를 풀어내고 위로받는다.
“저도 대학 시절인 21살 때 등산을 시작했다가 27살 때 결혼하고 중단했어요. 35살이 돼서야 딸을 데리고 등산을 재개했죠. 장시간 산길을 걸으며 장대한 풍광을 바라보노라면 지금의 고민이 별것 아니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묘코산, 히우치산, 야리가타케, 리시리산 같은 소설 속 배경들은 직접 취재를 다녀온 곳. 소설엔 자신의 경험을 곳곳에 녹였다. 요즘 작가의 ‘등산 루틴’은 편집자 네댓 명과 하루 대여섯 시간씩 산을 타는 것. 산장에서 2~3일씩 머무는 만만찮은 코스를 즐긴다. 산에서 하는 ‘미식체험’을 좋아하는데, 이 또한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등산할 땐 프랑스빵이나 초콜릿 같은 좋은 간식과 맛있는 맥주가 필요해요. 산에서 먹는 최고의 음식은 최고의 사치로, 나에게 주는 선물이죠.”
이번 작품에는 그밖에도 일본의 거품경제가 절정이던 1980년대에 대한 회고와 거품이 꺼진 90년대를 비교하는 이야기가 스치듯 나온다. 일본의 이런 경제적 변화는 사회가 기대해온 ‘여성성’의 변화를 가져다주기도 했다고 한다.
“거품경제 시기엔 아무래도 많은 젊은 여성들이 명품 옷에 명품 가방을 들고 남자들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곤 했죠. 당시 사람들은 등산하는 여자들을 두고 비정상적이고 야만적이라는 식으로 취급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다르죠. 산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잖아요? 더 많은 여성들이 산에 올라 더 큰 세계를 만나길 기대합니다.”
결혼 뒤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올해로 데뷔 11년이 된다. 아이가 잠든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글을 썼고, 육아와 가사로 녹초가 되곤 했지만 덕분에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댈 겨를도 없었다. 그런 경험이 자신을 강하게 만들었다며 작가는 웃었다.
“여성의 강인함은 남성을 넘어서는 것 같아요. 힘들 때도 내 고민만을 끌어안고 앉아 있을 수 없으니까요. 고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가 독립하면 장기여행 같은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어쩌면 새로운 취미가 또 작품 속에 반영되지 않을까요?”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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