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의 미래-기억의 정치 끝에서 기념문화를 이야기하다최호근 지음/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2만1000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 35주년을 맞아 열린 5·18 기념식은 바로 이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 여부를 둘러싼 갈등으로 두 쪽이 났다. 보훈처 주관으로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공식 기념식에서는 노래를 합창단이 주도해 불렀고, 같은 시각 망월동 묘역에서 진보적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이 치른 기념식에서는 노래를 모두 다 함께 불렀다. 기념하는 대상은 같았지만 기념하는 법은 달랐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 1944년 12월과 1945년 1월 아름답고 푸른 강가에서 약 3500명의 민간인이 독일 나치의 앞잡이인 ‘화살 십자가’ 민병대들한테 처참하게 살해됐다. 헝가리 예술가들은 그 비극을 주인을 잃은 예순 켤레의 신발로 표현했다. 2014년 4월16일 헝가리 홀로코스트 추모일에 한 여성이 신발을 어루만지며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부다페스트/AFP 연합뉴스
최호근 고려대 사학과 교수가 최근 낸 <기념의 미래>는 제주 4·3,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광주민주화운동 등 과거사를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를 탐색한 책이다. 과거사 관련 위원회들의 활동 이후 기념재단과 기념공원, 전시·교육 기능을 갖춘 기념관이 설립되면서 ‘기념의 제도화’가 진행됐다. 최 교수는 “역설적이게도 기념의 제도화는 참기 어려운 기억의 갈증을 낳고 있다”며 “기억을 잉태하지 못하는 기념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가 기대하는 것은 풍요로운 기억을 산출하는 기념이다. 고사 직전의 기념공원, 방문객의 발길이 끊어진 기념관, 타성에 젖은 전시, 데면데면한 기념의례, 모방 일변도의 기념물을 우리 국민이 계속 용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념물이 기억을 낳지 못할 때, 뒷세대는 과거에 무관심하고 아예 잊어버릴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저자는 우리의 기념문화를 진단하며 날선 비판을 한다. ‘국가를 위한 죽음’과 ‘국가에 의한 죽음’을 혼동하고 있다고 짚는다. “국가폭력을 고발하는 경고의 기념물, 상기의 기념물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무슨 생각으로 충혼의 탑을 또 세운 것일까?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4·19, 5·18, 거창, 산청·함양의 기념 첨탑은 무사유의 결정체다.” 민주묘지나 평화공원에 들어선 수직 기념탑과 거대한 문, “열병하고 있는 군대를 연상시킬 만큼 자로 잰 듯이 대오를 갖춘 무덤들”, 똑같은 모양으로 깎아놓은 묘비와 무덤 양식을 “개념 부족의 소산”이라고 질타한다. 국가폭력을 고발하는 공간을 국가주의 양식이 점령했다는 지적이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국립서울현충원)를 모델로 삼아 조성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제는 ‘기억투쟁’에서 ‘기념문화’로 이행할 때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기억의 정치는 기념공원과 기념관, 기념재단을 세울 땅을 마련하고 그 기관들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예산 확보와 더불어 끝난다. (…) 기념공원을 ‘어떻게’ 조성하고, 전시를 ‘어떻게’ 설계하며, 전시활용 교육을 ‘어떻게’ 운영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렇지 못하다. ‘어떻게’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문화적 역량이다.”
제주 4·3 평화공원 위령탑은 하늘을 향해 치솟은 첨탑 모양이 아니다. 원형의 조형물은 아래로 푹 꺼진 땅 한가운데 서 있다.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제공
우리 기념문화의 역량을 확인해주는 시험대는 제주 4·3평화공원이라고 한다. 이곳의 위령탑은 첨탑이 아니고 원형의 조형물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리의 형세다. 조형물은 언덕처럼 솟아오르지 않고 아래로 푹 꺼진 땅 한가운데 서 있다. (…) 국가폭력에 의한 대량학살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구상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양 최대 규모”라고 얘기되는 위령제단은 뿌리 깊은 국가주의 기념을 대표한다고 짚는다. “유가족들이 사라진 후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될 방문객들에게 거인족의 유산 같은 이 제단이 애도의 마음을 갖게 해줄 수 있을까? 그게 걱정이다.”
1949년 1월 토벌대의 총격으로 아래턱을 잃고 홀로 살다 숨진 ‘무명천 할머니’(본명 진아영)가 살았던 집의 내부. 최호근 교수는 독일 학자와 함께 할머니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할머니의 삶이 떠올라 통곡을 했다고 한다.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제공
지은이는 애월읍 하귀리 영묘원에서 마을 공동체 복원 의지를 읽고, 108개의 ‘잃어버린 마을’이 있었던 사실을 알려주는 팽나무에서 “살아 있는 기념물”을 본다. 1949년 토벌대의 총격으로 아래턱을 잃고 홀로 세상과 등지고 살다 숨진 ‘무명천 할머니’는 저자에게는 홀로코스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안네 프랑크와 같은 사람이다. 할머니의 집이 박물관으로 바뀔 것이라는 소식에 걱정이 앞선다. “작은 도시락, 피 밴 무명천, 낡은 베개와 잠자리, 할머니가 분신처럼 남기고 간 신발 한 켤레만 있어도 이곳은 기억을 촉발하는 기념의 모퉁이 돌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국립 5·18 민주묘지의 추모탑. 탑은 그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석조 ‘추념의 문’과 하나가 돼 방문객을 압도한다. 최호근 교수는 “국립 현충원 모델을 확대 적용한 것 같은 이런 공간 구성이 민주주의를 위해 국가폭력에 맞서 싸웠던 다양한 시민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데 최적의 효과를 발휘하게 하는지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제공
이어 한국전쟁 때 양민이 미군에 학살된 충북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인 옛 전남도청, 국립 5·18 민주묘지와 망월동 묘지,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을 분석한다.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에 대해 “기록으로 기억을 촉구하는 기억의 터를 누가 찾는다면, 나는 기꺼이 이곳을 첫 번째로 추천하고 싶다”고 말한다. 서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쟁기념관, 국립서울현충원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국립서울현충원의 현충탑.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제공
저자의 시선은 국외의 기념물들로도 향한다. 이들 나라가 어떤 논의와 고민의 과정을 거쳐 과거를 어떻게 기념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 고민을 ‘궁리’라는 말로 표현한다.
독일 뮌헨의 나치기록센터와 베를린 ‘테러의 지형도’에서는 가해자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을 본다. 베를린의 외진 곳에 자리한 ‘안네 프랑크 센터’는 작은 박물관이다. “나는 ‘아우슈비츠 없는 아우슈비츠 교육’이 가능한 사례를 안네 프랑크 센터에서 보았다. 정서적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집단학살의 민낯을 지나치게 묘사하지 않으면서, 부담스러운 역사에서 출발하여 평화를 지향하는 교육을 해나갈 수 있다면, 어찌 우리의 바람이 아닐까?”
독일 베를린의 후미진 곳에 있는 ‘안네 프랑크 센터’를 많은 어린이들이 찾고 있다.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제공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복원’과 ‘보존’ 사이의 길항을 읽는다. “더 많은 시설에 대한 복원은 신기루를 좇는 욕망의 발걸음, 허망한 절규에 가깝다.” 과거 모습 그대로 복원했을 때 방문객한테서 “공감적 상상력”을 빼앗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 1944년 12월과 1945년 1월 아름답고 푸른 강가에서 약 3500명의 민간인이 독일 나치의 앞잡이인 ‘화살 십자가’ 민병대들한테 처참하게 살해됐다. 헝가리 예술가들은 그 비극을 주인을 잃은 예순 켤레의 신발로 표현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둑과 미국 워싱턴 홀로코스트기념관의 ‘신발’에 주목하는 대목에서 지은이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1944년 12월과 1945년 1월 약 3500명의 민간인이 살해된 강둑에 헝가리의 예술가들은 쇠로 만든 신발 예순 켤레를 설치했다. “신발이 아닌 다른 방식의 기념물이었다면,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은 이 어이없는 현실에 접근할 길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미국 워싱턴 내셔널몰에 있는 베트남전 참전용사 기념의 벽.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제공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제 그만 과거사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아가자고 한다. 저자는 단호하다. “과거사들과의 지속적 대면과 철저한 가공 없는 미래 얘기는 기망이다.” 과거사와의 결별은 오직 ‘적극적 가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적극적 가공은 기억의 활성화다. 사회적 기억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살아 있는 기념이 필수적이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미국 워싱턴 내셔널몰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 기념물.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