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 밀러 지음, 이민경 옮김/아르테·2만4000원 임신중지를 택한 여성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슬픔에 빠져 있거나 죄책감을 느끼거나 인공유산을 한 사실을 부끄러워하며 숨기는 모습이 떠오르는가? 혹은 마땅히 그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안타깝지만 임신중지를 한 모든 여성이 그렇진 않다. 사회관계망서비스를 중심으로 번져나갔던 해시태그 운동 ‘#네 낙태 경험을 말해봐’(#shoutyourabortion)를 통해 여성들이 말한 경험을 보면 ‘구원받은 듯한’, ‘감사한’, ‘후회 없는’이란 표현도 들어 있다. ‘행복한 임신중지’(Happy Abortion)란 원제가 나타내듯, 책은 임신중지에 대한 감정과 서사가 결코 단일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저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임신중지 운동사를 톺아보면서 임신중지를 둘러싼 상식과 규범이 사회적, 정치적으로 어떻게 구성돼왔는지, 여성의 선택권으로 한정되는 프레임이 임신중지에 대한 논의를 어떻게 왜곡하는지 짚는다. 특히 ‘애통함’과 ‘수치심’을 기반으로 재현되는 임신중지 경험이 “여성이라면 누구나 ‘좋은 어머니’가 되길 바란다”는 모성신화에 기대 있다는 것, ‘좋은 어머니’에 대한 환상이 실은 국가주의, 민족주의, 계급, 인종과 장애, 젠더권력과 같은 요소에 철저히 결부돼 있다는 점을 꼬집는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건강’을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사회적으로도 완전히 안녕한 상태’로 정의한다. 4월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란 결정을 내리면서 여성의 건강권과 재생산권에 대해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제 겨우 출발선에 섰을 뿐이다. <임신중지>는 관련 논의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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