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렘, 과학의 뒷골목
해리 콜린스·트레버 핀치 지음. 이충형 옮김. 새물결 펴냄. 1만4500원
해리 콜린스·트레버 핀치 지음. 이충형 옮김. 새물결 펴냄. 1만4500원
과학이 차갑고 비인격적이고 정밀하다고?
차라리 일상적이고 논쟁적이다
그러나 배관공 완벽하지 않다고 반배관공 외치지 않듯
과학자들 부실하다고 반과학 움직임 옳지 않다
한국 과학은 지금 참담하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논문 조작 의혹은 과학이 언제나 확실한 진리에 바탕을 두어 성장하는 모습만은 아니며 터무니 없는 실수에다 조작까지 더해진 엉터리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과학의 확실성은 하루아침에 불확실한 것이 되어 논쟁 대상이 되고 조사와 폭로 기자회견의 대상이 됐다. 과학은 늘 순수한 진리의 길만 걷고 있지 않았음을 2005년 12월의 경험이 한국 사회를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참담함 속에서 한국사회는 지금 학습 중이다. ‘과학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두고.
영국의 과학사회학자 해리 콜린스와 트레버 핀치가 쓴 <골렘, 과학의 뒷골목>(새물결 펴냄)은 이런 기막힌 상황에 때마침 우리말로 출간돼 과학에 열광했던 우리사회를 되돌아보게 하는 진지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이 책에 담긴 일곱 가지의 과학논쟁 에피소드는 과학 실험현장의 뒷얘기, 과학자 사회의 논쟁·갈등·타협·권위가 담긴 과학의 풍경들을 전한다. 1993년 처음 출간돼 서구사회에 이른바 ‘과학전쟁’을 촉발시킨 책이다.
이 책에서 과학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과학지식의 절대적 권위에 익숙한 이들에겐 낯설기까지 하다. 그가 묻고 답한다. “과학은 무엇인가? 과학은 바로 골렘이다.” 유대인의 신화에 나오는 인간의 창조물인 골렘이 과학과 닮음꼴이라니.
골렘과 과학이 닮은꼴
골렘은 진흙과 물을 섞은 뒤 마법과 주문을 가해 사람이 만든, 사람 닮은 인조인간을 말한다. 피조물 골렘은 날마다 조금씩 더 강력해진다. 골렘은 사람의 명령을 따라 일을 대신 해주고 사람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다루기가 무척 힘들어 통제하지 못하면 엄청난 힘을 마구 휘둘러 주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여러 신화들 속에서 그것은 때로 무시무시한 악마로, 또는 실수투성이의 거인으로 등장하곤 했다.
콜린스와 핀치는 골렘의 비유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우리는 이 골렘이 사악한 창조물이 아니라 약간은 얼간이 같은 존재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과학의 그릇된 신화를 벗겨보자는 식이다. 그렇지만 골렘 과학이 실수를 저지른다 해서 이를 비난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실수들은 바로 우리 자신의 실수이기 때문이다. 골렘이 최선을 다해서 일한다면 우리는 골렘을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 골렘은 매우 강력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의 솜씨와 기술로 만든 피조물인 것이다.”
골렘의 실수를 우리 품에 끌어안는 법도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골렘 과학의 진짜 모습을 제대로 알아야 하잖은가, 잘 차려 입은 무대 위 과학이 아니라, 무대 뒤편의 과학도 이해해야 하잖은가.
바로 일곱 가지의 과학 에피소드는 무대 뒤편의 이야기들이다. 지은이들을 따라 무대 뒤로 가보자. 거기엔 과학의 다른 모습들이 있다. 화장하기 전 어수선한 맨얼굴, 무대에 오르려고 준비하다 일어나는 갖은 실수들(물론 ‘인위적 실수’는 아니다!), 무대에 먼저 나서려고 말싸움하는 사람들…. 이 책이 보여주려는 바는 이처럼 무대 위에선 이야기되지 않는, 무대 뒤편의 풍경들이다. “과학은 너무 차갑고, 비인격적이며, 원자폭탄처럼 정밀함을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 ”일상적이며, 자극적이고 논쟁적인” 것이다.
일곱 가지 에피소드는 여러 시대와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과학논쟁들이다. 상대성이론을 증명한 두 가지 실험은 어떻게 이론을 증명했는가, 파스퇴르는 자신의 부실한 실험결과를 바탕으로 어떻게 생명체의 자연발생설과 벌인 논쟁에서 승리했는가, 기억을 화학적으로 옮길 수 있다고, 또는 상온에서 핵융합을 구현했다고 주장한 소수 과학자들은 권위 있는 주류 과학자들의 논쟁에서 어떻게 패배했는가, 등은 과학 논리만으로 다 해명되지 않는 과학 안의 갈등, 논쟁, 권위 같은 사회적 요소들을 보여준다.
과학자는 신도 협잡꾼도 아니야
한 가지 에피소드를 들여다보자. 미국 유타대학의 화학자 플라이슈만과 폰즈는 1989년 태양 에너지의 생성원리인 ‘핵융합’이 시험관 안에서 구현됐다고 발표했다. 중수가 담긴 비커와 음극인 팔라듐, 양극인 백금 전극이 간단한 장치의 전부였다. 이게 사실이라면 태양이 에너지를 내는 방식이 시험관 안에서도 구현된다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에너지 과학의 발견이 될 것이었다. 뒤이어 이 실험을 재연했다는, 또는 재연할 수 없다는 연구발표들이 잇따랐다. 논문 발표에 앞선 ‘기자회견 과학’이 기세등등했다. 언론의 열광은 과학계의 검증을 압도해버렸다. 의회는 상온 핵융합 연구를 지원하는 거대 예산을 준비했고 부시 대통령은 직접 연구상황을 보고받았다. 그러나 상온 핵융합은 불가능하다는 물리학계의 잇따른 반박 앞에서 이런 화학자의 주장은 급속히 힘을 잃어버렸다.
일곱 가지 과학논쟁 이야기를 거친 뒤에 남은 과학은 어떤 모습일까.
지은이들은 과학에 대한 두 가지의 그릇된 태도를 비판한다. 하나는 과학기술을 만능해결사나 절대 진리로 바라보는 시각, 다른 하나는 과학기술을 자연적 아름다움의 파괴자나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도구로만 바라보는 반(反)-과학의 시각이다.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신인가 아니면 협잡꾼인가? …우리가 여기서 시도해온 것은 (이런) 질문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다. 즉 과학자들은 신도 그렇다고 협잡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정치 무대의 다른 모든 전문가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전문가들일 뿐이다.…배관공들은 완벽하지 않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가 반 배관공 운동에 나서지는 않는다. 반 배관공은 우리에게 가능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선택이 아닌 것은 역선택, 즉 배관에서는 오류가 없어야 한다는 선택 또한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안은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의 신화를 구축하는 이들은 연구현장의 과학자들이라기보다 연구현장 밖의 이른바 과학의 ‘자경단원’들이라고 지적하는 지은이들은 이들이 만드는 그릇된 신화가 ‘반 과학’을 부추기고 있다고 경고하며, ‘기술사회의 민주주의’를 말한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골렘의 실수를 우리 품에 끌어안는 법도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골렘 과학의 진짜 모습을 제대로 알아야 하잖은가, 잘 차려 입은 무대 위 과학이 아니라, 무대 뒤편의 과학도 이해해야 하잖은가.
신성한 진리로 여겨지는 과학은 무대 뒤에서 보면 실수와 논쟁, 타협, 권위, 불확실성의 산물로서도 이해된다. “과학은 신도 아니고 협잡꾼도 아니다”라며 과학의 본모습을 바라보라고 <골렘>의 저자들은 말한다. 사진은 ‘2005년 줄기세포 논문 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황우석 교수가 서울대조사위원회 조사 이틀째인 19일 수의대 건물 안에서 걸어가고 있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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