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의 교훈새뮤얼 체임버스 지음, 김성준 옮김/그린비·2만8000원
자크 랑시에르는 현존하는 정치철학자 중에 첫손으로 꼽히는 사상가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자신에겐 정치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한 예로, 2009년 랑시에르는 자신의 저술을 다룬 일련의 논문들이 <시차>라는 학술지에 게재되자 이 논문들에 대한 답변글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며 “그는 정치나 미학, 문학, 영화, 혹은 다른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하나의 이론을 만들어 내고자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자신의 작업이 ‘정치이론’이 되기를 거부하고, 설명하기란 곧 “바보 만들기”로 정의하는 랑시에르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해설서를 쓴다는 것은 모순적인 면이 없을 순 없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정치이론과 문화정치학을 가르치는 새뮤얼 체임버스가 랑시에르에 관한 책을 쓰면서 가장 먼저 직면해야 했던 문제도 이것이었다. 어떻게 랑시에르의 주요 개념을 충실하게 설명하고, 다른 정치이론들과의 관계는 무엇인지 확정 지음으로써 궁극적으로 랑시에르를 안정화시키는 일을 피할 것인가? 체임버스는 <랑시에르의 교훈>에서 체계를 짓는 대신에 정치·치안·문학·비판이라는 랑시에르의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그의 저작을 읽어나가며, 특히 영미권 비평가들의 랑시에르에 대한 오독과 논쟁하는 길을 택해 이 난관을 벗어난다.
2008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자크 랑시에르 파리8대학 명예교수.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랑시에르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정치’라고 부르는 것을 ‘치안’(프랑스어로는 la police, 영어로는 the police)이라고 다시 정의함으로써 수많은 독자와 특히 정치이론 연구자들을 자극하고 도발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치안은 경찰관이 행사하는 강제력과는 구별된다. 오히려 그가 말하는 치안질서란 우리 모두가 매일 살아가는 사회질서 그 자체다. 체임버스는 랑시에르의 치안화를 “하나의 사회구성체를 구조화하고 질서화하는 것과 관련된 현상의 광범위한 집합을 명명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라고 정의한다. 곧, 치안은 현실을 배열하며, 무엇을 보이게 하고 무엇은 보이지 않게 하는 힘이다. 랑시에르 본인은 치안을 이렇게 설명한다. “정치는 일반적으로 집단들의 총화와 동의가 달성되는 절차들의 집합으로 이해된다. (…) 권력의 조직화, 장소와 역할의 나눔, 이 나눔을 정당화하는 체계들을 (…) 나는 치안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불화>)
그렇다면 그에게 정치는 무엇일까? 랑시에르는 “정치는 언제나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실로 정치는 매우 적게 혹은 드물게 발생한다”(<불화>)고 말했다. 정치는 그저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인간의 가장 탁월하고 고귀한 활동’ 같은 것도 아니다. 정치는 언제나 중단, 개입, 혹은 효력을 수반한다. 정치는 불일치이며, 무언가를 파열시키는 것이다. 체임버스는 “정치는 치안질서에 도전하고 방해하면서 그 질서를 파열시키거나 전치시키며, 어쩌면 결국에는 치안질서를 변화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정치가 수행하는 일의 전부”라고 말한다.
투쟁의 전형적인 사례인 파업에서 이 점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파업이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하는 데 그친다면, 파업은 정치의 순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 경우 파업은 치안질서 안에서 협상을 위한 움직임일 뿐이다. “어떤 것도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지만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정치적이지 않다.” 체임버스는 랑시에르를 따라 “파업은 작업장의 편성 자체를 의문에 부칠 때 비로소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만약 파업이 불일치의 순간, 감각적인 것의 주어진 나눔이 파열되는 순간을 표지한다면, 우리는 파업을 정치의 순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현재의 합의제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치안질서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 정치의 종언을 추구한다. 합의제 민주주의는 ‘합의’라는 상술을 이용해 근본적인 파열적 갈등, 불화를 폄하하고 가능한 한 제거하려고 한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 정치를 자유주의라는 틀 안에 가두어두려는 힘에 저항하며 자유주의로부터 민주주의를 떼어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샹탈 무페와 같은 급진민주주의자들과도 갈라진다.
그렇다고 랑시에르가 민주주의 정치로 치안질서를 대신하거나 제거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랑시에르를 아나키즘과 연결해 ‘치안을 제거해야 할 적’으로 지목하는 해석자들도 있지만, 이 또한 랑시에르를 왜곡하는 것이다. 정치는 치안질서에 묶여 있으면서도 치안질서와의 갈등에 개입해야 한다. 정치는 오직 치안질서를 재교섭하고 다시 짜는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랑시에르는 정치에 고유한 장소를 제공하려는 유혹에 저항한다. 정치와 치안은 뒤섞여 있다. 치안이 정치를 오염시킬 수 있지만, 그렇기에 정치 또한 치안을 오염시킬 수 있다.
랑시에르의 많은 독자가 그의 급진적인 논의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기대했던 것을 바란다고 체임버스는 지적한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랑시에르가 주는 희망과는 다르다. “진정한 희망은 정치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이 아니다. 진정한 희망은 민주주의 정치가 존재하는 것을 변화시키고, 주어진 것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희망이다.”
이 책이 해설서라는 의심을 벗어나는 또 하나의 지점 중 하나는 체임버스가 퀴어정치에 호의적인 논평을 내놓은 적이 없었던 랑시에르의 논의를 동원해 퀴어정치를 옹호하는 비(非)랑시에르적 결말을 맺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독자들도 이 책을 각자 통과한 뒤 직접 랑시에르를 읽고 그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과 실천을 생산함으로써 ‘랑시에르의 교훈’을 이행하라고 독려한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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