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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페미니즘, 그건 사랑에 대한 이야기

등록 2019-07-12 06:00수정 2019-07-13 15:04

임신·출산·양육 함께…돌봄 도맡아
”여성·엄마만 감당하는 것들 있더라
‘남성 페미니스트’ 그 과정에 있을 뿐”
두번째 페미니스트
서한영교 지음/아르테·1만6000원

고백하자면, 책을 처음 받아든 순간 제목을 보고 아주 살짝 눈을 흘겼다. ‘남성 페미니스트’의 존재는 언제나 반갑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못내 미심쩍었던 게다. 언제든 빨간펜으로 교정이라도 볼 기세로 책장을 열었다가 저릿한 마음과 함께 마지막 장을 닫았다. ‘아, 이건 사랑에 대한 이야기구나’ 싶었다. 궁금해졌다. “두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라는 심보선 시인의 말처럼, 첫번째 사람의 ‘곁’을 지키고 선 마음으로 ‘두번째 페미니스트’가 되겠다는 서한영교씨가. 10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그는 말했다.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겪는 세계와 사랑이란 이름으로 겪는 세계가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페미니스트>를 낸 서한영교 작가가 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기 전 책을 펴 읽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두 번째 페미니스트>를 낸 서한영교 작가가 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기 전 책을 펴 읽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두번째 페미니스트>는 임신·출산·양육 과정을 함께 겪고 ‘돌봄’을 도맡아 ‘남성 아내’로 변화해 온 서한씨의 기록이다. 28개월인 아들 서로를 애인이 처음 임신했을 때부터 페이스북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38개월간 애쓰려 했던 과정 속에서 길어낸 말, 페미니즘을 근간이자 상상력, 원동력으로 돌리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의 조각들을 모았다.

문학청년이던 그의 세계에 금이 간 건 2001년 박남철 시인이 여성 시인을 성희롱한 소위 ‘욕시’가 등장했을 때다. 그때 페미니즘에 입문했다. 하지만 ‘아빠’가 되어 마주하는 가부장사회는 또 다른 층위였다. 사회가 ‘아버지’라는 자리에 요구하는, 대부분은 젠더에 기반한, 권위와 역할과 관성에 자꾸 부닥치게 되면서 그는 다시 기록했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출산 이후 100일간은 애인이 수유와 산후조리에만 온전히 집중하고 서한씨는 그밖의 모든 돌봄노동을 맡았다. 300일쯤부터는 시간대로 나눠 날이 밝은 동안 그가 주양육자가 된다. 그의 육아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지난해 3월엔 ‘아빠의 젠더감수성’ 좌담회에 강연자로 서기도 했다. “그날 좌담회가 끝나고 정말 평범해 보이는,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아버지가 오셔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초등학교 3학년 딸과 1학년 아들을 키우고 있는데 단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오늘 너무 영감을 많이 받고 간다면서 울먹이시는 거예요. 그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생각했던 문장이 ‘엄마에게 젖이 있다면 아빠에게 품이 있다’는 거였어요. 저는 수유를 할 수 없고, (아이에게) 첫번째가 돼주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페미니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아요. 적어도 ‘품’을 줄 수 있는 남성으로서 (누군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장면들이 있고, 그렇다면 무언가를 주장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다’고 보여주는 글 정도는 써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죠.”

서한영교 가족 사진. 아르테 제공
서한영교 가족 사진. 아르테 제공
서한씨는 조그만 메모 노트를 습관처럼 손에 쥐고 있었다. 아이가 한 말, 아이를 보며 느끼는 감정들을 바로 적는다고 했다. 그렇게 적은 노트가 200개가 넘었다. 그는 거듭 “아이와 정말로, 진짜로 이어져 있더라”며 경이를 구태여 숨기지 않았다. 눈이 멀어가는 애인과의 만남이 그가 ‘장애’란 렌즈로 세상을 확장해서 보게 된 계기였다면, 아이를 양육하며 만난 세계는 여성과 어머니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그는 “아이를 키우면서 여성과 엄마들만이 감당해야 하는 것들을 (직접) 느끼게 됐다”고 했다.

“집밥을 날마다 차려낸 어머니를 요즘 자주 떠올린다. 나는 어머니의 수고만으로 차려지는 집밥을 이제 그리워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머니를 겪고 있는 탓이다.”

서한영교와 아들 서로. 아르테 제공
서한영교와 아들 서로. 아르테 제공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경제’에 가려진 착취 구조에 저항하기 위해 일상의 실천을 고민하면서도 “나는 페미니스트인가?”란 질문 앞에서 그는 여전히 망설인다. “남성으로서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끝끝내 결과에 도달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 있을 뿐이죠.” 수유의 감각만큼은 태생적으로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처럼, 그에게 페미니즘은 결국 “불가능하지만 가까워지려고 애쓰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 바랐던 김선우 시인의 문장에 기대 “과제와 책임을 떠맡아 열렬히 응답하는 사람으로서의 두번째 페미니스트”를 지향한다고 했다.

“한 사람의 남성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가부장적 경계를 용감하게 넘을 때 여성과 남성, 그리고 아이들의 삶이 더 나은 방향으로 근본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나는 살면서 알게 되었다.” 서한씨가 “영감을 터지게 받았다”는 작가 벨 훅스의 이 문장처럼, 책은 사랑을 위해, 사랑하기 위해 가부장적인 경계를 용감하게 넘어선 남성의 치열한 투쟁 기록이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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