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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호부호형’에 만족한 길동의 혁명

등록 2005-12-29 19:26수정 2005-12-30 16:18

신동우 화백이 그린 만화를 바탕으로 만든 국산 애니메이션 <돌아온 영웅 홍길동>의 한 장면.
신동우 화백이 그린 만화를 바탕으로 만든 국산 애니메이션 <돌아온 영웅 홍길동>의 한 장면.
부당함 고발 그것뿐 번혁의지 미숙 홍씨 집안 제사권 얻고 갈등 봉합 율도국 왕위 아들이 계승 우울한 결말 조선 바깥에 이상향 보편성 확보 못해

고전 다시읽기/홍길동전

<홍길동전> 하면 무엇을 떠올리오? 아내에게 물었더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운운하는 길동의 애절한 대사라고 하였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만큼 이 소설은 서얼차별의 불합리에 항거한 사회소설로서 우리 고전문학 가운데서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더구나 이 소설은 통속소설의 흥미 요소도 많이 지니고 있다. 길동이 둔갑술, 축지법, 분신법을 사용하는 대목을 보라. 여덟 길동이 팔도에 출몰하다가 모두 자수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한꺼번에 넘어지매 모두다 풀로 만든 허수아비였다는 대목은 너무도 통쾌하다. 몸을 쪼개어서라도 한 날 한 시에 여러 일을 동시에 하고 싶은 현대인의 욕망을 시대보다 앞서 문학으로 형상화한 듯도 하다. 조선 후기에 필사본들이 많이 나오다가, 19세기에 목판본까지 나온 것은 그런 주제의식과 통속적 요소 때문이다. 근세에도 계속하여 번안물이 나왔고, 현대에도 아동용 소설과 만화, 애니메이션으로 개작되는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소설은 길지 않다. 경판본이 24장, 완판본이 조금 길어 36장에 불과하다. 이야기 구조도 복잡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읽어본 독자가 얼마나 될까? 그 결말에 이르러 쓸쓸함을 느껴본 독자가 과연 있을까?

길동은 여덟 분신을 만들어내어 팔도에서 신이한 도술로 탐관오리들을 징계하지만, 임금의 회유에 따라 병조판서를 제수 받고는 작란을 그만둔다. 그리고 고국을 떠나 율도국을 정벌하여 그곳의 왕이 된다. 그런데 그 사이에 길동은, 고국을 떠나 남경으로 가다가 망당산에 들어가 울동이란 요괴를 물리치고 백룡의 딸과 도철의 딸을 구해낸다. ‘백룡’과 ‘도철’은 신이한 동물의 이름이다. 길동이 그 둘의 딸들을 구해내어 두 아내로 맞이하는 대목은 완전히 귀계의 무용담이어서 비현실적이다. 이야기가 왜 이렇게 흘러가야 했을까? 그 이유는 길동이 고국을 떠나기 전에 임금을 알현하고 하는 말을 통해서 짐작할 수가 있다.

신분제 개혁 임금에 청하지 않아


“신이 전하를 받들어 만세를 모실까 했으나, 제가 천한 종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문(文)으로는 홍문관이나 예문관 벼슬길이 막혀 있고, 무(武)로는 선전관 벼슬길이 막혀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방을 멋대로 떠돌아다니면서 관청에 폐를 끼치고 조정에 죄를 지었던 것이온데, 이는 전하로 하여금 아시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이제 신의 소원을 풀어주시니, 전하를 하직하고 조선을 떠나가옵니다.”

아아, 그랬다. 길동이 활빈(活貧)의 의거를 행한 것은 버젓한 문무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울분을 풀기 위해서였고, ‘전하로 하여금 아시게 하려던 것’에 불과하였다. 그의 행동은 서얼 차별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그것뿐이었다. 길동은 조선의 신분제도를 개혁해 줄 것을 임금에게 청하지 않았다. 그렇게 건백(建白)조차 하지 않은 것은 이 소설이 나올 당시에 사회변혁의 기운이 성숙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소설의 작가는 조선에서 신분제도의 개혁이 일어나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기에, 길동으로 하여금 조선을 떠나게 만들었던 것이리라.

이런 것을 두고 구성상의 작은 흠이라고 간주하여도 좋다. 하지만 <홍길동전>에는 자기 검열의 기제가 작용하고 있다. 이야기의 배경을 성군인 세종대왕의 치세라고 하여 놓고, 팔도로 길동의 분신들을 파견하여 ‘각 읍 수령이 백성들을 들볶아 착취한 재물을 빼앗도록’ 하였다. 실상 <홍길동전>은 비정(秕政)을 고발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소설 속의 길동은 성군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할 따름이었다. 변혁의지가 미숙하기만 하다.

활빈당의 근거지(제도)로 돌아와 있던 길동은 아버지의 죽음을 예견하고 월봉산에 거대한 묘역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서울 집으로 돌아가 이미 타계한 부친의 시신을 월봉산으로 운구하여 삼년상을 마친다. 길동은 적장자 인형보다도 더욱 적통을 이은 사람처럼 상장(喪葬)을 집행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길동이 홍씨 집안의 제사권을 지닌 것처럼 묘사하였다. 길동이 율도국 왕에 오른 뒤, 임금이 길동의 이복형 인형을 사절로 파견하였으므로 인형은 어머니 유씨와 함께 율도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유씨가 병을 얻어 죽자 길동은 유씨를 부친의 능에 쌍장하였다. 그리고 뒷날 모친 춘섬이 죽자 역시 부친의 묘역에 안장하고 삼년상을 지냈다. 제사권을 획득함으로써 길동은 신분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난다. 하지만 이 성취는 개인의 성취일 따름이다. 그것도 조선의 바깥에서 실현하였을 따름이다. 길동이 율도국에서 72살로 죽고 그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마지막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우울해지 않을 수 있으랴.

소설의 이야기 구조는 여러 층위를 지닌다. 그렇기에 순량한 독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따라가며 읽을 수도 있지만, 비판적 독자의 위치에서 구조를 비틀어 볼 수도 있다. 그 모든 시점과 시선을 다 견뎌낼 만한 완벽한 소설이란 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사가 다양한 국면을 지니고 있듯이 소설도 다양한 국면을 지니고, 그 국면들은 서로 우위에 나서려고 뒤엉켜 싸우는 것이다.

길동의 이복형 인형은 경상감사로 부임해서 길동의 자수를 권하는 공고문을 내걸어, “만일 너를 잡지 못하면 우리 홍씨 집안의 여러 대에 걸친 깨끗한 덕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게 된다”고 애걸하였다. 길동도 가문의 보존이 제일 중요하다고 여겨 순순히 자수하였다. 그런데 길동의 부친, 그 부인 유씨, 길동의 형 인형은 초란이 길동을 제거하려는 계책을 꾸몄을 때 사실상 그 계책에 동의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길동은 그들을 모두 ‘용서’하였다. 그리고 <홍길동전>의 작가는 그들과 길동 사이의 갈등을 가문 보존이라는 허구적인 공동 목표 아래에서 슬그머니 해소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첨예한 갈등을 덮어두고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는 일이 과연 가능하단 말인가? 그것은 진정한 화해를 영구히 뒤로 미룬 셈이 아닌가? 근본적인 갈등을 길동의 ‘용서’와 공동 목표의 확인만으로 서둘러 봉합한 것은 바로 소설 속 주인공 및 작가의 변혁의지가 일그러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도술 부리기 개인문제 축소 도구

<홍길동전>의 작가는 의적을 등장시켜 사회 제도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혁명성을 드러내었다. 그 점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판적 시점에서 이 소설을 읽을 때, 길동의 변혁의지는 매우 미숙하기만 하다. 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 부르게 됨’을 성취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조선 바깥의 이상향에서 ‘오래오래 잘 살다가 죽으면서 그 행복의 조건을 자손에게 물려주었다.’
심경호/고려대 교수·한문학
심경호/고려대 교수·한문학
길동의 변혁의지는 사회적 보편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말았다. 바람과 비를 부르고 둔갑장신하는 초인간적인 그의 도술도 사회구조를 뒤바꾸지 못 하고, 한 개인의 원한을 해소하고 오랜 바람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제한되었다.

조선후기의 가문의식이 덧 씌워지면서 <홍길동전>에 이런 흠이 생겨났는지 모른다. 사실 이 소설의 조본(祖本)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 길동이 현실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려고 나서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곧, 변혁을 운위하는 우리 시대에 <홍길동전>이라는 고전이 우리에게 보내는 우울한 메시지인지 모른다. 아아, 길동이 나아간 길은 구름만 자욱하였으니, 그 구름은 율도국의 왕이라 하여도 걷어내질 못하였다. “첩첩한 산중에 구름만 자욱한데 정처 없이 길을 가니 어찌 가련치 않으랴!”

서평자 추천 도서

홍길동전/전우치전/서화담전

허균 등 지음, 김일렬 옮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펴냄(1996)

(경판본과 완판본을 모두 현대어로 번역하고 필요한 어휘에 역주를 달았다)

홍길동전

허균 지음, 로은욱 윤색

연문사 펴냄(2000)

(‘평양 : 문예출판사, 1985’의 영인본. 쉬운 현대어로 윤색한 것이 특색이다)

홍길동전의 비밀

설성경 지음

서울대출판부 펴냄(2004)

(홍길동전의 성립 배경과 주제에 대해 포괄적인 해설을 하였다)

50자 서평

◇ 만호짱(알라딘 마이리뷰에서) “홍길동아, 안녕? …의적으로서 많은 재물을 가난한 백성에 돌려주어 나는 너에게 큰 감명 받았어. …너는 매일 둔갑과 도술, 영리한 머리를 이용해 위기를 극복했지. 나는 그 중에서 허수아비로 따돌린 얘기가 가장 재미있었어.”

◇ 혜린이얌(〃) “그는 왕이 되어 백성을 다스린다. 그것이 계급사회 타파를 외쳤던 홍길동의 모습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또 다른 나라로 건너가 새로운 이상을 세우고자 하는 홍길동의 모습이 나에게는 개혁이 실패하고 좌절하여 도피한 것처럼 보인다.”

◇ 미누리(〃) “홍길동의 의로운 정신과 함께 이야기의 근간이 되는 것은 효의 정신이다. …둔갑술, 축지법 같은 홍길동의 동화적 모습보다는 그의 높은 기상과 깊은 효심을 아이가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성공적인 책읽기가 될 것이다.”

▽ 다음주 이후 고전 <장미의 이름>, <추측과 논박>, <자성록>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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