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희 시집 <오리막>
“우물은 가장 오래된 기억의 창고”
잃어버린 시의 우물 속으로 두레박질하면
토란이며 살구나무 시인이
시를 불러준다, 귀를 기울여보라
1987년, 만 열아홉의 조숙한 나이로 등단했던 시인 유강희(37)씨가 두 번째 시집 <오리막>(문학동네)을 내놓았다.
“그때는 가난했으나 뜨거움이 뭔지를 알았고 속 떨리는 눈물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지 어린 우리들도 알 수가 있었다//…//어쩌다 식구들 모두 뿔뿔이 흩어져 한 양푼의 뜨거운 고구마를 가슴속에 묻고 살아가는가/이렇게 살아도 아주 먼 훗날 얼음 깔린 동치미국을 훌훌 나눠 마시며/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깊은 우물처럼 오래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식은 고구마를 먹으며>라는 시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말줄임표를 경계로 앞부분은 어릴적 식구들과 뜨거운 고구마를 호호 입김 불며 나눠 먹던 과거를 추억하고, 뒷부분은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진 뒤 혼자서 식은 고구마를 먹는 현재를 서술한다. 옛일이 뜨겁고 순정한 그리움을 지핀다면, 현재는 차갑고 두려운 회한을 낳는다. 시집 <오리막>은 크게 보아 이와 같은 과거 대 현재의 이분법 위에 놓여 있다. 인간적인 과거 대 각박한 현재.
인간적 과거와 각박한 현재
앞에 인용한 시에 ‘우물’이 비유적으로 등장하지만, 진짜 우물이 등장하는 시도 있다. <버드나무 우물>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우물의 과거와 현재는 생명과 죽음으로 극단적으로 갈린다. 사람들이 버드나무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고 살았던 과거를 서술한 전반부에 비해 시의 후반부는 우물의 죽음을 증언한다. 우물은 왜 죽었나.
“삼 년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던/그 버드나무 우물/언젠가부터 사람들은 하나 둘 버들잎 날리듯 동네를 떠나고/그 우물 속 검은 이끼들도 쇳빛으로 말라가기 시작했다/그리고 어느 날 저녁 무렵 그 버드나무에 목을 매달고 우물은 죽었다/그러자 우물 속에 살던 구렁이 과부도 노란 달과 구름도 따라 죽었다”
사람들이 동네를 떠남에 따라 우물이 버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물이 ‘스스로’ 목을 매달고 죽었다고 시인은 썼지만, 우물의 존재 이유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지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버려진 우물의 자살이란 사실상 사람에 의한 타살이라 해야 온당할 것이다. 우물이 생명의 원천이었던 만큼 우물의 죽음이란 곧 생명의 죽음이요 고갈이라 할 수 있겠다. 그와 함께 중요한 것은 우물의 죽음에 이어 구렁이 과부와 달과 구름도 따라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전설 또는 신화의 죽음이라 할 수 있으리라. 시집 뒤에는 ‘잃어버린 시의 우물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시인이 쓴 산문이 덧붙여져 있다. 여기서 시인은 “우물은 가장 오래된 기억의 창고이자 허물어지지 않는 어머니의 영원한 자궁”이라 규정하고, “나는 오늘도 그 잃어버린 시의 우물을 찾아 더 깊은 곳에 두레박을 던진다”고 쓴다. 그렇다면 분명해졌다,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일은 죽은 우물을 되살리는 두레박질에 해당한다는 것이.
그런데 시인은 어떻게 두레박질을 하나?
“그 잎 위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너의 마알간 시가/너보다 서럽게 맺혀 있다//토란밭 앞을 지날 때면/내가 백 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생각이 내 앞을 가로질러 네 둥근 발부리에 먼저 가 눕곤 한다”(<토란>)
“제 나이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한 그루 늙은 살구나무에 불과하지만/가만히 가만히 옆에 다가가 귀 기울여보면/살구나무 할아버지는 언제나 시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살구나무 할아버지>)
인용한 두 작품에서 시를 쓰거나 생산하는 것이 토란과 살구나무라는 자연물임을 주목하자. 시는 시인이 쓰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일이란 토란이며 살구나무가 불러주는 시를 받아 적는 것에 그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그 진짜 ‘시인’들의 곁에 가만히 다가가 귀를 기울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며칠 전 트럭에 치여 죽은 새끼에게 가던 길에 역시 차에 치여 죽은 풀뱀이며, 조산기가 있는 새끼를 낳기 위해 사람 사는 방 안으로 쫓기듯 들어온 겨울날의 어미쥐, “어머니의 늙은 자궁 같은/오래된 돌확”(<돌확>)을 젖처럼 빨아먹으며 자라는 새끼 우렁 같은 미물들이 시인에게 시를 선사한다. 그것은 미물들만도 아니어서, “올핸 감이 많이도 오셨네”(<밤골 할매의 까치밥>)라 말할 줄 아는 밤골 할매, 담배 ‘타임’을 달라는 시인에게 번번이 ‘타인’을 주는 “큰길 옆 검버섯처럼 가무소롬 피어 있는 계룡댕이 수퍼”(<계룡댕이 수퍼>) 할매,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할멈 대신/밥 빨래를 다 하는 할애비”(<굴뚝새 그 집>)도 역시 시인에게 시를 준다. 그것도 거저로.
12월이면 왕겨 부비는 소리
시인이 횡재를 한 것인가. 일단 그렇다고 해 두자.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커다란 비용과 희생을 치른 뒤의 것이랴. 시인은 짐짓 “이곳보다 더 외로운 사람들이 살고 있을/서울”(<벼 말리는 사람>)이라 눙치지만, “누런 짚동이처럼 몇 가구만 남은 마을”(<오리막3>)에서 사는 삶이 외롭지 않다면 새빨간 거짓말일 터. 같은 시의 결구에서 “두 마리의 오리는 두고 온 집을 그리며 목메게” 울지만, 우는 것은 실은 시인 자신인 것이다.
시집의 맨 마지막에 실린 작품은 제목이 <12월>이다. 첫줄과 마지막 두 줄이 다음과 같다.
“12월이 되면 가슴속에서 왕겨 부비는 소리가 난다/…/12월이 되면 가슴속에서 왕겨 타는 소리가 나고/누구에게나 오래된 슬픔의 빈 솥 하나 있음을 안다”(<12월>)
어느새 12월과 함께 올 한 해도 다 갔거니와, “때까우와 기러기와 토끼와 닭과 강아지”(<자서>)와 함께 사는 시인의 12월은 어떠했는가. 아직도 남은 폭설 속의 겨울은 또 어떠한가. 안부가 궁금하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람들이 동네를 떠남에 따라 우물이 버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물이 ‘스스로’ 목을 매달고 죽었다고 시인은 썼지만, 우물의 존재 이유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지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버려진 우물의 자살이란 사실상 사람에 의한 타살이라 해야 온당할 것이다. 우물이 생명의 원천이었던 만큼 우물의 죽음이란 곧 생명의 죽음이요 고갈이라 할 수 있겠다. 그와 함께 중요한 것은 우물의 죽음에 이어 구렁이 과부와 달과 구름도 따라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전설 또는 신화의 죽음이라 할 수 있으리라. 시집 뒤에는 ‘잃어버린 시의 우물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시인이 쓴 산문이 덧붙여져 있다. 여기서 시인은 “우물은 가장 오래된 기억의 창고이자 허물어지지 않는 어머니의 영원한 자궁”이라 규정하고, “나는 오늘도 그 잃어버린 시의 우물을 찾아 더 깊은 곳에 두레박을 던진다”고 쓴다. 그렇다면 분명해졌다,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일은 죽은 우물을 되살리는 두레박질에 해당한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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