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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리는 길들인다, 고로 진화한다

등록 2019-12-20 06:01수정 2019-12-20 20:07

생물인류학자가 추적한 가축과 작물의 역사
“진화는 일방적 지배가 아닌 서로 길들여지는 것”

세상을 바꾼 길들임의 역사
앨리스 로버츠 지음, 김명주 옮김/푸른숲·2만5000원

리처드 도킨스는 “고고학의 아름다움은 두 고고학자가 똑같은 데이터를 보고서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데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고고학을 실로 우아하게 포장한 헌사이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소설’ 쓰지 말아야 하는 중압감에 시달린다. 아주 제한적인 화석과 뼈다귀들에 의거해 수천 수만 년 전의 생활상을 상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계의 정설은 몇 년을 주기로 엎치락뒤치락 한다.

이 분야 최고 논쟁거리 중 하나가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됐을까'이다. 1만년 전 신석기인이 늑대를 의도적으로 선택해 길들였다는 게 정설(인위선택)이었는데, 정착 부족의 쓰레기장 주변에서 기웃거리던 청소동물(늑대)이 스스로 가축의 삶을 선택했을 거라는 가설(자기길들임 혹은 자기가축화)이 나오더니, 이번엔 수렵채집인이 살던 3만년 전 구석기 시대로 훌쩍 뛰어 늑대도 개도 아닌 ‘늑대-개'가 기원일 것이라는 주장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어슴푸레한 과거를 추적하는 도구는 고고학 말고 셋이 더 있다. 역사학, 지질학 그리고 유전학이다. 특히 유전학은 최근 들어 분자유전학이라는 강력한 도구로 개량돼 논쟁의 해결사 노릇을 한다. 시료를 구하기 어려워 그렇지 디엔에이(DNA)만 분석하면 종의 분기, 서식지, 식생활 같은 대략적인 것들이 나온다. 지은이는 ‘네 가지 도구’를 들고 인간이 길들인 개, 밀, 소, 옥수수, 감자, 닭, 쌀, 말, 사과 그리고 자신을 길들인 인류까지 10종의 역사를 추적한다. 네 가지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것은 인간 문화와 동물 유전자와 상호작용을 꿰뚫는다는 얘기이다. 비슷한 주제로 많이 읽힌 브라이언 페이건의 <위대한 공존>보다 한 발 나아갔다.

개는 아주 작은 ‘치와와’부터 큰 덩치의 ‘그레이트 데인’까지 다양한 변이를 보여준다. 찰스 다윈은 이런 인위선택의 양상을 통해 진화이론의 기초가 되는 자연선택의 영감을 얻었다. 구석기개와 유사한 그린란드개. 출처 위키미디어코먼스
개는 아주 작은 ‘치와와’부터 큰 덩치의 ‘그레이트 데인’까지 다양한 변이를 보여준다. 찰스 다윈은 이런 인위선택의 양상을 통해 진화이론의 기초가 되는 자연선택의 영감을 얻었다. 구석기개와 유사한 그린란드개. 출처 위키미디어코먼스

‘인류세의 화석’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성한 닭은 매년 600억 마리가 도축된다. 과거에 수탉은 오락 목적(투계)으로, 암탉은 계란을 목적으로 길렀다. 베네딕트 수도회가 단식 기간에 두 발 동물 먹는 걸 허용한 사건이 닭의 유전자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지은이는 추측한다. 사람들은 살찐 닭을 선호하게 됐고, 당연히 ‘포동포동 유전자’가 퍼졌을 것이다. 소는 가축이 되면서 인간의 유전자를 바꾸었다. 원래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성체가 되면 젖당을 소화할 수 없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젖소를 길러온 유럽인의 98%는 락타아제를 생산해 젖당을 분해한다. 반면, 목축업이 발달하지 않은 동아시아인은 이 비율이 현저히 낮다.

근대 사회 이후 인간-자연, 문명-야만, 서구-비서구 등 이분법이 지배해왔다. 다윈의 진화혁명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자연과 대비해, 자연 밖의 존재나 진화의 종착역쯤으로 특수화하는 경향이 생물학에서도 강했다. 그러나 저자가 줄곧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자연의 진화 속에 있고, 지금도 진화는 계속된다는 점이다. 우리 종은 다른 종의 진화에 영향을 주며, 다른 종은 우리 종의 진화에 영향을 준다. 이 과정에서 어떤 종은 길들임을 거부했고(다른 종을 택했을지도), 어떤 종은 길들여져 도움을 주고 이익을 취했다. 공진화의 가장 강력한 형태인 가축이 되는 과정은 쌍방향이다.

지은이는 진화가 일어나는 자연을 온갖 생물들이 ‘뒤엉킨 강둑’으로 표현한 <종의 기원> 마지막 단락을 바꿔 쓰면서 책을 끝맺는다. 지은이는 정원에서 사과나무의 가지를 쳤는데, 열매를 먹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사과나무를 중심으로 윙윙거리는 벌들과 검은 수송아지, 오색딱따구리가 모이고 흩어진다. 정원은 길들여진 것과 길들여지지 않은 것들이 뒤엉킨 강둑과 같았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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