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누가 이런걸 생각이나 했을까

등록 2020-01-23 17:26수정 2020-01-24 02:38

아이디어가 고갈된 디자이너를 위한 책
: 일러스트레이션 편·타이포그래피 편

스티븐 헬러·게일 앤더슨 지음, 윤영 옮김/더숲·각 권 1만4000원

누굴까. 어린 아이처럼 모래밭에 앉아 새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이 남자. 누가 봐도 그 정체를 알아챌 수 있는 이 그림은 <뉴요커> 표지에 실린 아니타 쿤즈의 일러스트 작품이다. 핵무기를 보유한 세계 최연소 지도자를 ‘장난감이 일으킬 수 있는 끔찍한 피해를 깨닫지 못하는’ 어린아이로 취급해 신랄한 메시지를 던졌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최신 업데이트 된 이슈를 알지 못해도 그림만 보면 작가의 의도를 대충 훑을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만약 원시시대의 동굴벽화가 원시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쓰였다면 그것이 바로 일러스트레이션의 시작이라 하겠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현대에서는 각종 잡지나 광고, 책, 포스터, 상품의 목적과 용도에 따라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익숙함’과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독창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작업. 스티븐 헬러와 게일 앤더슨은 세계적 거장 50인으로부터 디자인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작들과 아이디어를 모아 4권의 책을 완성했다. 앞서 출간했던 ‘그래픽 디자인’과 ‘로고 디자인’에 이어 이번에는 ‘일러스트레이션’과 ‘타이포그래피’를 다뤘다.

&lt;뉴요커&gt; 잡지 표지에 실린 아니타 쿤즈의 ‘새 장난감’(2016) . 수소폭탄을 터트린 김정은을 미성숙한 아이처럼 묘사했다. 더숲 제공
<뉴요커> 잡지 표지에 실린 아니타 쿤즈의 ‘새 장난감’(2016) . 수소폭탄을 터트린 김정은을 미성숙한 아이처럼 묘사했다. 더숲 제공

일러스트는 교육을 통해 충분히 배울 수 있는 분야이지만, 수학처럼 공식을 따른다 해서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일러스트레이터는 재능, 적성, 훈련의 조합을 통해 뛰어난 전달자이자 영악한 계몽가가 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번뜩이는 재치와 개성을 담은 영감, 상상력을 바탕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실행 능력이 요구된다.

책은 디자인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이전에 그 자체로도 아름답고 재미있는 볼거리를 선사한다. 머리카락 타래를 활용한 환상적인 분위기의 글자, 흡혈박쥐로 변신한 어떤 책의 속사정, 카메라인 양 손에 들린 잉크병, 관능미 내뿜는 만년필 촉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넘겨버릴 수 없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들이 빼곡하다. 이런 작품들 안에는 창작자 개인의 경험이나 욕구, 시대적 상황 등이 담기기도 한다. 1969년 처음 출간된 에릭 칼의 <배고픈 애벌레>는 펀칭기로 구멍난 종이에서 태어나 수십 년 넘게 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지독한 빈곤을 경험한 칼은 사랑스럽지만 굶주린 캐릭터로 이야기를 만들었고, 이 동화는 그에게 ‘꿈꿔오던 맛있는 것들을 실컷 먹을 수 있는 기회’로 돌아왔다. 우연한 발견에 창작자의 영감이 더해진 캐릭터는 보는 사람과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이직을 외치고 날마다 사장 이름 ‘김명중’을 불러대며 직장인들의 칠성급 사이다로 떠오른 교육방송(EBS) 소속 연습생 펭수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노흐 피벤이 완성한 스티브 잡스 캐리커처. 전구와 아이폰으로 만든 잡스의 모습은 &lt;타임&gt; ‘100명의 영향력 있는 인물’ 기사에 쓰였다. 더숲 제공
하노흐 피벤이 완성한 스티브 잡스 캐리커처. 전구와 아이폰으로 만든 잡스의 모습은 <타임> ‘100명의 영향력 있는 인물’ 기사에 쓰였다. 더숲 제공

타이포그래피도 보는 이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콘셉트를 분명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일러스트와 궤를 같이한다. 책에서는 타이포그래피의 기초지식을 넘어선 모방, 언어유희, 활자 변형 등 다양한 접근법을 볼 수 있다. 아내와 딸의 발을 변형한 기이한 알파벳, 말소리가 눈에 보이는 듯한 회화, 무질서 속에서 찾아낸 나이키 광고 등이 그렇다. 서체의 종류, 알파벳의 대·소문자, 맞춤 제작한 글자 등의 쓰임은 “디자인의 핵심이자 가장 강력한 도구”인 타이포그래피의 완성도를 좌우한다. 매일 새로운 아이디어에 시달리다 길을 잃은 창작자들이여, 이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보자.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도 하니까.

김세미 기자 abc@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