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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먼지처럼 빛나다

등록 2020-01-31 06:00수정 2020-01-31 09:17

[책&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겨울방학
최진영 지음/민음사(2019)

어린 시절 나는 방학을 주로 외가에서 보냈다. 낯설고 다른 것들을 경험하게 해 주려는 뜻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어머니는 방학 동안만이라도 육아의 부담을 덜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도시에서 접하지 못한 자연과 외지인을 향한 타인의 환대를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을 단지 한 시절의 추억으로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동생을 낳고 몸이 아픈 어머니를 잠시 떠나 고모의 집에서 겨울 방학을 지낸 ‘이나’의 추억은 그런대로 따뜻한 동화처럼 읽힌다.(‘겨울방학’) 이나는 자신이 사는 ‘푸르지오’ 아파트와 고모가 사는 ‘빌라’의 차이를 너무 잘 알았고, 자려고 누우면 신발이 보이는 고모의 집을 거침없이 ‘가난’으로 칭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시절 고모가 최선의 배려로 자신을 돌보았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고모의 따뜻하고 반듯한 마음이, ‘겨울방학’이라는 포근한 제목이 소설집 전체의 어둡고 막막한 분위기를 다소 완화시키고 있는 것일까. 이나의 이야기에 비해 다른 인물들의 삶은 너무 멀고 막막하다. 매일 시내의 매장에서 밤늦도록 일하고 막차를 타고 비상 활주로를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는 삶과 같은 막막함이 반복된다.(‘막차’) 캄캄한 비상 활주로를 난폭하게 달리는 버스에 치여 죽은 동생을 떠올리며 살아 있는 일의 죄책감을 감당해야 한다. 그들은 문을 열면 벽이라고, 나가고 싶지 않다고, 기권하고 싶다고 절규한다.(‘囚’(수))

아버지가 사장이고 아들이 부장인 작은 장난감회사에서 일하던 ‘나’는 회사의 유해물질 불법사용을 고발했고,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고, 그 이후에도 회사는 멀쩡했다.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째서 어린 시절의 ‘장미’를 계속 떠올렸을까.(‘돌담’) 자신의 가난을 들키기 싫어 장미를 외면했던 죄책감이, 또는 동생이 죽은 길을 살아서 계속 오가야 했던 삶에 대한 부채가(‘막차’), 그리고 “네가 내게 배운 것이 가난만은 아니기를” 바랐던 고모가(‘겨울방학’) 우리의 삶에 작은 ‘돌’ 하나를 쌓아 나를 지키는 담을 만들었다는 것을 이제 안다.

고모와 함께 보낸 겨울방학의 따뜻한 추억은, 막차를 타고 매일 어두운 밤을 지나는 날들의 반대편에 있지 않다.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를 상쇄하지도 희석하지도 위로하지도 않는다. 추억처럼 잊었던 고모가 푸르지오밖에 모르던 이나를 어느 날 다른 곳으로 이끌기도 했을 것이다. 함부로 취급받지 않았던 어느 단 하루의 날이 다른 날들의 존엄을 깨우치고 지킬 것이다. 우주는 너무 크고 어두워서 우리는 한 점 먼지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먼지 같은 존재로 우리는 충분히 가까이 있다. 우주에서 날아온 돌멩이 때문에 지구가 없어진다고 해도, “우린 어떤 식으로든 같이 있을 수밖에 없다.”(‘어느 날(feat. 돌멩이)’) 나는 겨울방학처럼 따뜻해졌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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