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시가농장에는 아직도 낭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이야기꾼, 렉토르(lector)가 존재한다. 이승원의 책 <사라진 직업의 역사>에는 낭독을 통해 라디오나 텔레비전과는 맞바꿀 수 없는 이야기꾼의 영원한 따스함을 느끼며 노동의 고됨을, 하루의 피로를, 인생의 번뇌를 잊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묘사된다. 사진은 2009년 쿠바 아바나의 담배공장. EPA 연합뉴스
인생의 어떤 시기마다 가장 친한 친구는 조금씩 변한다. 나는 요새 친구들을 거의 못 만나고 ‘오디오북’이라는 새로운 친구와 사랑에 빠졌다. 육아와 직장일에 바쁜 친구들과 시간 맞추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요즘, 나는 ‘약속을 하지 않아도 늘 만날 수 있는 친구’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얼굴 보기도 힘든 나의 소중한 친구들을 몹시 사랑하지만, 현재 스코어 가장 친한 벗은 오디오북이 되어버렸다. 눈뜨자마자 오디오북을 켜고, 세수할 때나 지하철을 탈 때나 자투리 시간에도, 잠들기 직전까지 오디오북을 들으며 하루를 마감하니, 오디오북은 세상 누구보다 친밀한 벗이 되어버렸다. 종이책만 읽을 때보다 독서량이 두 배로 늘었고, 타인의 목소리로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들으니 마음의 불안을 달래주는 효과도 크다. 타인의 낭독을 듣는 것만큼 나의 목소리로 낭독하는 시간도 늘어간다. ‘월간 정여울’이라는 글쓰기 팟캐스트를 진행하면서 청취자에게 책을 낭독해주고, ‘백은하의 영화관, 정여울의 도서관’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도 낭독의 기쁨을 느낀다. 묵독은 독서의 시각적 효과를 최대화하지만, 낭독은 독서의 청각적 효과는 물론 오감을 자극한다. 낭독자의 목소리, 그날 그 장소의 독특한 분위기, 책과 함께하는 커피의 향기와 맛, 책장을 넘기는 질감까지. 낭독은 독서가 오감의 축제임을 환기하는 최고의 촉매다.
더 섬세하고 더 강렬하게 해주는 낭독
낭독은 혼자 있을 때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축제가 가능함을 일깨워준다. 낭독은 문학작품이 지닌 고유의 향기를 천 배로 부풀려주기 때문이다. 얼마 전엔 최은미의 소설 <아홉번째 파도>를 소리내어 읽다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미 세 번이나 묵독으로 읽은 소설인데, 낭독으로 다시 읽어보니 감동이 수백 배로 부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지방도시의 공익근무요원인 서상화는 주민들의 위생관리를 위해 정화조를 시찰하는데, 사랑하는 여인 송인화 앞에서 자신의 몸에 밴 정화조 냄새를 들킬까 싶어 차마 그녀 곁에 다가가지 못한다.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만 볼 뿐 차마 다가가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노인들한테 심한 말을 듣고 났을 때나 터무니없는 민원 전화를 받았을 때, 감정을 감추고 있지만 송인화의 몸 어딘가에는 꼭 표가 났다. 서상화는 자신이 그걸 발견할 수 있는 게 좋았다. 송인화가 책상 파티션에 사진 하나 안 붙여놓는 것도 좋았고 회의 문건의 비읍만 볼펜으로 메우는 것도 좋았다. 손등 위에 하얀 핸드크림을 짜 올리는 것도 좋았고 귓불에 빛처럼 박혀 있는 귀고리도 좋았다. 자신이 끙끙거리면서 읽고 있는 약학 서적들을 이미 다 보았다는 것도 좋았다. 업무 얘기로 들어갈 때마다 차갑게 빛나는 눈도. 고개를 돌릴 때마다 나는 어떤 냄새, 살짝 갈라진 머리끝, 그걸 아무렇게나 묶고 있는 모습도 좋았다. 차에 걸어둔 인형도, 더 자주 입어주었으면 좋겠는 청록색 블라우스도. 코에 낀 피지도 좋았고 그 피지가 알려주는 콧방울의 선도 정말, 너무 좋았다.” 사랑하는 이의 아주 사소한 디테일, 심지어 코에 낀 피지조차도 아름다워 보이는 그 설렘의 기적을, 낭독은 더욱 생생하게 부풀려준다.
아무리 손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정화조 냄새에 괴로워하며, 차마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청년의 마음이 슬프도록 아름답다. 이 소설은 매우 복잡하고 거대한 스케일을 지닌 장편이지만, 이 짧은 대목을 읽기만 해도,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영롱하고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소리내어 읽어보면, 곧바로 이 천진무구한 청년의 마음이 곧 우리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첫사랑의 설렘임을 느낄 수 있다. 이런 것이 바로 문학작품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는, 일상 속의 작은 기적이다. 이런 순간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먼 훗날 인생의 길을 잃고 헤맬 때, 고통에 짓눌려 몸부림칠 때, 마음속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따스한 촛불이 되어줄 것이다. 아름다운 작품을 소리까지 내어 읽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결코 꺼지지 않는 촛불 하나를 켜놓는 것이다.
우울과 불안 다스리는 치유제
낭독과 함께하는 독서 모임은 우울과 불안을 다스리는 훌륭한 치유제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 황광수 선생님과 나는 3년째 둘만의 독서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매달 한 권의 책을 읽고, 서로 좋아하는 대목을 소리내어 읽어주고, 자신의 느낌을 적은 발제문을 낭독해주기도 한다. “여긴 네가 읽어봐라.” “이 대목은 선생님이 읽어주세요!” 이렇게 서로 낭독을 부추기면서 그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수많은 영감을 교환한다. 선생님은 영어나 독일어 원서를 시중에 나온 번역본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번역해 오시기도 하고,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해서 정돈된 발제문으로 써 오시는데, 나는 책 읽어 가는 데만 급급해서 그저 선생님을 볼 수 있다는 기쁨으로 해맑게 웃으며 독서 모임에 참석한다. 얼마 전에는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를 서로 낭독해주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세미나가 끝나고 나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끊임없이 읽고 쓰는 삶은, 나를 분명히 바꾸어놓았다고. “요새 제 마음속에 어수선함, 뒤숭숭함이 사라져가고 있어요. 아침에 꿈을 잔뜩 꾸고 일어나면 마음속이 거대한 실타래처럼 얽혀서 우울해지곤 했거든요. 이제 그런 느낌이 사라져가요. 제 안의 무언가에 대한 집착을 버렸나봐요. 그 끈질긴 집착이 떠나간 자리에서 새로운 사랑을 위한 마음의 여백이 자라나는 느낌이에요. 요새는 문학을 향한 첫사랑을 다시 찾은 느낌이거든요. <호밀밭의 파수꾼>이 그렇게 감동적인 줄 몰랐는데, 지금 읽으니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완전히 내 이야기 같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예전엔 너무 길고 장황하다며 투덜거렸는데, 지금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읽어요.” 선생님은 나를 바라보시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으셨다. “그래, 그 뒤숭숭함이 사라지는 것이 정말 어렵지. 네 글에서도 그게 보여. 네가 잘 헤쳐나가고 있는 것이 내 눈엔 보인다.” 이렇듯 낭독은 친구와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고, ‘내가 누군가에게 완벽히 이해받을 수 있다는 느낌’을 사무치도록 깨닫게 한다.
아카데미 시상식 4관왕을 석권한 <파이 이야기>의 원작자 얀 마텔은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에서 오디오북을 예찬한다. “여행하는 길에 들어보려고 오디오북 몇 권을 사긴 했지만, 캐나다 북부지역의 웅장한 풍경이 내 눈 앞에 펼쳐지는 동안 저에게 어떤 이야기를 집요하게 속닥이는 목소리를 듣는 건 거북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삼 분 정도의 팝송이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겠지만 스물네 시간 동안 끝없이 계속되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게 쉽겠습니까? 그래서 오디오북이 저를 미치게 만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이 틀렸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오디오북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반가움에 키득키득 웃었다. 오디오북의 그 끝없는 속삭임, 바로 그 ‘집요하게 속닥이는 목소리’가 나를 치유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도 복잡해서, 상처가 많이 나아졌다 싶으면 어느새 또 재발하고, 엉뚱한 곳에서 트라우마가 다시 엄습하여 간신히 다잡아놓은 마음이 단 한 번의 충격에 흐트러지기도 한다. 나는 문학작품을 읽고 낭독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20년간 해오면서, 인간은 매일 적극적인 치유가 필요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매일 한 페이지만이라도 읽고 낭독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 나아질 것이다. 집요하게 속닥이는 소리,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향해 속삭이는 소리, 우리에게 단 한 번 주어질 뿐인 삶의 소중함을 속닥이는 소리, 지겹고 지루한 일상 속에 낭독이라는 이름의 축제가 감추어져 있음을 속삭이는 소리. 그 낭독의 소리 덕분에 나는 매일 치유되고 매일 굳세게 다시 일어서고, 매일 힘겨운 오늘을 살아낼 힘을 얻는다. 언어의 기원은 ‘문자’가 아니라 ‘말’이었으니. 우리는 말을 통해 위로받고 말을 통해 서로를 향한 사랑에 빠지는 본성을 영원히 버리지 못할 것이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