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희정∙유해정∙이호연 지음/한겨레출판·1만5000원 사회에서 약자는 모멸 받는다. 익명의 온라인 공간에서 사회구조적 분노를 약자에게 쏟아내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한편, 사회에서 약자는 치켜세워지기도 한다. 여성이, 장애인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약자성을 ‘극복’한 ‘훈훈한 미담’은 종종 전파를 타지만, 그 약자성이 비롯하거나 견고해진 배경에 대해선 자주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이 받는 폭력은 그저 운명이 내려준 원초적 고통일 뿐이며, 따라서 고통을 감내하는 일은 그들 인생의 당연한 숙제라는 듯. 모멸과 치켜세움은 결국 방향을 달리할 뿐 함께 하나의 원을 그린다. 힘 있는 자는 원 안에 남고 약자는 원 바깥으로 내몰린다. 문제는 안에 남은 이들이 ‘대상화할 권력’을 당연하다는 듯 취한다는 데 있다. 권력은 약자의 고통, 일상, 감정, 심지어 인성에 대해서도 쉬이 떠들고 재단하며 상처를 기어이 벌려놓는다. <나는 숨지 않는다>는 이러한 대상화에 반기를 든 여성 11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책에 등장하는 한부모 여성가장, 홈리스 여성, 탈북 여성, 장애 여성 등은 하찮게 여겨지는 것도, 칭찬을 받는 것도 모두 거부하며 ‘숨지 않는다’. 대신 단단한 돌부리처럼 튀어나와 세상의 폭력에 대항하며 길을 만들어낸다. 2장의 탈북 여성 제시 킴은 ‘독재정권의 피해자’로도 ‘순수한 북한 미녀’로도 불리길 원치 않는다. 북한에 살던 십대 시절부터 스스로 밥벌이를 하던 그는 체제와 사상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탈북을 결심한다. 한국에 와서도 억지로 고향을 숨기거나 사투리를 고치려 하지 않는다. “당신들도 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 사는 것 아니지 않냐. 나는 북한이 아니라 혜산에서 태어나서 여기 이사 와서 살 뿐이다.” 책에서 강단 있는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6장의 묘현은 조현병을 가졌다. 일상을 보내다가도 불현듯 망상과 환청이 찾아오곤 한다. 불안에 떨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차 눈을 내리감고 스스로 다독이는 법을 깨우친 그다. 증상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성장하고, 고통스러운 기억까지 소환하며 ‘나’를 알기 위해 분투하는 그의 모습은 장엄하게 느껴진다. 조현병 환자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만 모두들 따지려 하는 사이, 그 납작한 논쟁을 비웃기라도 하듯 묘현과 다른 조현병 환자들의 삶은 진퇴를 거듭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책은 주체가 된 여성들이 ‘우리’에 주목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까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결국 ‘우리’한테 비슷한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른다. 1장의 한부모 여성가장 유지윤은 일을 하며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어 난처해 하던 끝에 마을 사람들과 십시일반 자금을 모아 지역아동센터를 만든다. 3장의 장애여성 임경미는 임신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대단하다’는 칭찬을 받는 일에 넌더리가 난다. 병원에 방문할 때 쏟아지는 의료진의 껄끄러운 눈빛과 몸짓도 지겨워지던 차, 문득 “우리 후배 장애여성들은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순간들이 모여 그의 삶을 바꿨다. 현재 그는 옥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장애인권활동가로 세상을 한뼘씩 바꿔나가고 있다. 11명의 여성들은 사회의 폭력에 질문을 던지고, 배제를 공존으로 바꾸고자 했다. 잔혹한 사회로부터 우리가 구원받고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건 이러한 비타협적인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 염치없지만 이들에게 오늘도 빚을 진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 박희정, 유해정, 이호연은 인권기록센터 ‘사이’의 활동가들로, 이 책은 이들이 각 여성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 남긴 구술 기록물이다. 이들 삶을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치부하지 않고 ‘서사’로 존중하기 위해 이야기의 구성 방식, 말투와 어휘까지 세심히 고른 게 느껴진다. 박윤경 기자 ygpar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