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소설에서 살인사건 예언서가 된 ‘요한 묵시록’의 주석서 삽화 가운데 하나. 마드리드 국립도서관 소장, 산 이시도로 필사본 원고에서.
“웃음은 원죄 잊게 하는 악마의 선물”
아리스토텔레스 희극 ‘시학’ 금지 둘러싼
중세 학문과 신앙의 대립 그려
국익이라는 ‘기호’로 진실을 가리고
인터넷으로 마녀사냥 한 우리 돌아보게 해
아리스토텔레스 희극 ‘시학’ 금지 둘러싼
중세 학문과 신앙의 대립 그려
국익이라는 ‘기호’로 진실을 가리고
인터넷으로 마녀사냥 한 우리 돌아보게 해
고전 다시읽기/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중세가 신이 지배하던 시대라면, 근대는 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중세에서 인간은 신앙으로 살고자 했다면, 근대에서 인간은 이성의 빛에 따라 살기를 희망했다. 그렇다면 전자는 암흑시대고, 후자는 계몽시대인가.
이런 빛과 그림자의 이분법은 중세 그 자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근대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만든 논리다. 중세와 근대는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이 태어나서 사랑하다 죽었던 어느 시대에서나 문명의 빛과 그림자는 있었다. 각 시대에는 그 사회 나름의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하는 삶의 문법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문법을 지키며 살았지만,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기존의 문법을 변형시키려는 투쟁을 벌였던 소수의 예외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투쟁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하고 그들은 이름도 없이 사라졌다.
1980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간됐지만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이런 사라진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인간 삶의 문법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다. 이 때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사고의 중심을 신에서 인간으로 바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성취했다. 이런 천지개벽의 변화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일어났는가.
이에 대한 수많은 학문적 연구가 있었다. 하지만 이 연구들이 그 변화를 완전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에코는 “우리는 설명할 수는 없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로써 이야기했다. <장미의 이름>은 소설이지만, 어느 역사책보다도 중세라는 낯선 세계를 가장 재미있고 또 진실되게 재현했다.
역사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회적인 사실들을 기록하지만, 문학은 일어났던 사실은 아니지만 일어날만한 개연성이 충분히 있는 일반사항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많은 삶의 진실을 대변할 수 있다고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에코의 소설은 중세의 일반적 사실들을 어느 역사책보다도 더 잘 보여줬다. <장미의 이름>은 최근 댄 브라운의 <다 빈치 코드>까지 이어지는 추리를 매개로 사실(fact)과 허구(fiction)의 결합인 ‘팩션’(faction)을 구현하는 포스트모던 역사소설의 원조다.
역사책보다 진실되게 중세 재현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우리는 중세라는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떠난다. 에코가 우리에게 보여준 중세는 암흑시대가 아니라 신앙과 이성, 신성함과 세속적인 것이 섞여 있는 그야말로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회색지대다. 중세적 삶의 문법과 근대적 삶의 문법 가운데 무엇이 더 옳으며 무엇이 더 좋은가를 현재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에코가 재현한 중세는 마녀재판을 하는 광기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장서관을 미로처럼 설계할 수 있는 수학적 능력을 가진 지성의 시대였다.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곧 현재에서 중세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지금 우리의 것과 다른 존재방식에 대해 거리감과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중세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 삶은 비즈니스이지만 당시 삶은 존재(여기 있음)였다.” 왜 중세의 수도사들은 교회 장서관의 서책을 보거나 번역하는 데 한평생을 바쳤으며, 심지어 금지된 책을 보기 위해 자기 몸을 파는 일조차 서슴지 않았을까. 인간의 지식에 대한 갈구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을 위해 지식을 추구하는가이다. 아담이나 중세의 수도사들은 비즈니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 곧 삶의 비밀을 추구하기 위해 서책을 보고자 했다. 에코는 책의 서문에서 이런 중세인들의 인생관을 라틴어 명언을 인용해서 이렇게 썼다. “내 이 세상 도처에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장미의 이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의 원인은 단 한권의 책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2권 때문이었다. <시학> 2권은 희극에 관한 것이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 뿐 아니라 웃음도 우리 삶에 유용하며 진리를 나르는 수레라는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르헤 신부는 웃음은 신의 권능을 부인하는 악마의 선물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웃는 순간 자신이 원죄를 진 존재라는 것을 잊고, 오직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금지된 지식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근대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시킨 시대다. 하지만 그렇게 커진 인간의 욕망만큼 인간이 행복해졌는지는 미지수다. 사라지는 것은 이름을 남긴다 <장미의 이름>에서 최대 논란은 장미란 무엇인가이다. 독자들에게 이 질문을 수없이 받았던 에코는 대답했다. “우리에게서 사라지는 것들은, 그 이름을 뒤로 남긴다. 이름은, 언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존재하다가 그 존재하기를 그만둔 것까지도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 대답과 더불어, 이 이름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 해석에 대한 결론을 독자의 숙제로 남기고자 한다.” 이제 달력 마지막 장의 끝 숫자 31이라는 기호와 함께 2005년이 저물고 2006년 새해가 열렸다. 다사다난 했던 2005년의 시간이 다 흘러간 뒤 남아 있는 것은 2005년이라는 기호뿐이다. 그 기호의 의미가 무엇인가는, 에코가 독자들에게 숙제로 남긴 것처럼, 우리 스스로가 내려야 할 대답이다. 2005년은 지나가서 없고 그 기호만이 존재할 때,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2006년을 살아야 하는 우리다. 하지만 그 ‘우리’도 결국은 죽어 없어질 존재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그 이름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사는가, 아니면 기호가 사는가. 내가 죽어서 기호가 된다면, 영원한 것은 기호다. 예수는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내 안에서 살고, 믿으면 죽어도 영생한다”고 했지만, 그 ‘나’는 이제 예수가 아니라 기호가 돼버렸다. 호르헤 신부가 예수를 절대적인 진리로 믿었다면, 월리엄 수도사는 그 진리란 이름뿐이라고 말했다. <장미의 이름>이 월리엄과 호르헤의 대결을 통해 우리에게 깨우쳐 준 진리는 진리란 알고 보면 이름뿐인 데, 그 진리라는 허상에 얽매이면 사라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 권처럼 자기 뿐 아니라 남을 파멸시키는 악마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악마로 만드는 것은 호르헤 신부가 휘둘렀던 권력이다. 진리의 권력화는 근대에 이르러서도 끝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됐다. 인간이 줄기세포를 만들어서 아름다운 장미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면 인간은 행복할까. 절대 권력은 부패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지식이 권력이 될 때, 그 지식 권력은 무엇보다도 무서운 사탄이 된다. 에코는 이러한 문명사적인 비극을 중세 말의 신앙과 학문의 대립을 통해서 그려냈다. 중세에서 사탄은 호르헤 신부처럼 역설적이게도 교회에서 생겨났다면, 우리시대 악의 꽃은 교회의 도그마를 파괴한 과학 속에서 피어나고 있다. 권력과 야합한 진리는 우상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권력과 야합한 진리는 우리를 눈멀게 하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우상이 된다. 중세 말에는 교회가 진실의 눈을 가리는 권력이었다면, 황우석 교수 사태를 통해 우리는 ‘국익’이 우리의 의식과 양심을 마비시킬 수 있는 우상임을 깨닫는다. 황 교수는 ‘국익’이라는 기호를 이용해서 줄기세포 논문의 진실을 은폐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를 신봉하는 우리시대 작은 호르헤 신부들은 인터넷으로 마냥사냥을 자행했다.
지난해 황 교수 쇼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 날을 예수의 탄생일로 축하한 것이 아니라 연인과 가족을 위한 축제를 벌였다. 중세에서 최고의 기호는 신이었다. 신은 ‘기호의 기호’로서 모든 의미를 독점했다. 하지만 근대에서 니체 말대로 “신은 죽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크리스마스라는 기호는 필요하다. 죽음과 헤어짐을 앞두고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이벤트라도 벌여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렇게 기호만이 의미있게 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우리 삶 자체를 기호로 만들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산다는 것은 결국 삶이라는 기호에 스스로가 수많은 해석을 창조하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한다.
서평자 추천 도서
장미의 이름 (상·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펴냄(개역판, 1992)
(너무나 유명한 번역서)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펴냄(2002)
(<장미의 이름> 깊이 읽기를 원하는 독자를 위한 해설서)
장미의 이름 읽기: 텍스트 해석의 한계를 에코에게 묻다
강유원 지음
미토 펴냄(2004)
(작품의 역사적 배경을 해명하여 포스트모던 해석을 경계함)
50자 서평
◇ 서우(인터넷서점 알라딘 마이리뷰에서) “(<장미의 이름 읽기>는) <장미의 이름>을 단순한 추리 소설로 바라 본 나의 어리석움을 일깨워 주었다. <장미의 이름>은 귀족의 마인드를 가지고 읽어야 할 지극히 고급스러운 그 무엇인 것이다.…그 내면에 들어 있는 (고전주의와 근대성의 대립 같은) 여러 대립각을 살펴 봐야 한다.”
◇ 동네친구(〃) “매력적인 주인공에 좋은 소재,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의 구조, 게다가 저자의 박식함까지 두루 갖춘 작품이다. 공부를 많이 하고 성찰도 많이 한 사람이 대중적인 것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걸까?”
◇ 그리움들(〃) “방대한 역사와 기호학적 의미 등등, 나에게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기어코 몇 주에 걸쳐 독파했다.…확실한 것은 내가 서양에 대해 정말 많이 무지하다는 것이다. 반복해 읽고 싶고 장미의 이름이 이해되기를 기대한다.”
▽ 다음주 이후 고전 <추측과 논박>, <자성록>,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cheolwoo@hani.co.kr
역사책보다 진실되게 중세 재현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우리는 중세라는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떠난다. 에코가 우리에게 보여준 중세는 암흑시대가 아니라 신앙과 이성, 신성함과 세속적인 것이 섞여 있는 그야말로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회색지대다. 중세적 삶의 문법과 근대적 삶의 문법 가운데 무엇이 더 옳으며 무엇이 더 좋은가를 현재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에코가 재현한 중세는 마녀재판을 하는 광기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장서관을 미로처럼 설계할 수 있는 수학적 능력을 가진 지성의 시대였다.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곧 현재에서 중세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지금 우리의 것과 다른 존재방식에 대해 거리감과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중세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 삶은 비즈니스이지만 당시 삶은 존재(여기 있음)였다.” 왜 중세의 수도사들은 교회 장서관의 서책을 보거나 번역하는 데 한평생을 바쳤으며, 심지어 금지된 책을 보기 위해 자기 몸을 파는 일조차 서슴지 않았을까. 인간의 지식에 대한 갈구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을 위해 지식을 추구하는가이다. 아담이나 중세의 수도사들은 비즈니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 곧 삶의 비밀을 추구하기 위해 서책을 보고자 했다. 에코는 책의 서문에서 이런 중세인들의 인생관을 라틴어 명언을 인용해서 이렇게 썼다. “내 이 세상 도처에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장미의 이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의 원인은 단 한권의 책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2권 때문이었다. <시학> 2권은 희극에 관한 것이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 뿐 아니라 웃음도 우리 삶에 유용하며 진리를 나르는 수레라는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르헤 신부는 웃음은 신의 권능을 부인하는 악마의 선물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웃는 순간 자신이 원죄를 진 존재라는 것을 잊고, 오직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금지된 지식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근대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시킨 시대다. 하지만 그렇게 커진 인간의 욕망만큼 인간이 행복해졌는지는 미지수다. 사라지는 것은 이름을 남긴다 <장미의 이름>에서 최대 논란은 장미란 무엇인가이다. 독자들에게 이 질문을 수없이 받았던 에코는 대답했다. “우리에게서 사라지는 것들은, 그 이름을 뒤로 남긴다. 이름은, 언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존재하다가 그 존재하기를 그만둔 것까지도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 대답과 더불어, 이 이름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 해석에 대한 결론을 독자의 숙제로 남기고자 한다.” 이제 달력 마지막 장의 끝 숫자 31이라는 기호와 함께 2005년이 저물고 2006년 새해가 열렸다. 다사다난 했던 2005년의 시간이 다 흘러간 뒤 남아 있는 것은 2005년이라는 기호뿐이다. 그 기호의 의미가 무엇인가는, 에코가 독자들에게 숙제로 남긴 것처럼, 우리 스스로가 내려야 할 대답이다. 2005년은 지나가서 없고 그 기호만이 존재할 때,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2006년을 살아야 하는 우리다. 하지만 그 ‘우리’도 결국은 죽어 없어질 존재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그 이름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사는가, 아니면 기호가 사는가. 내가 죽어서 기호가 된다면, 영원한 것은 기호다. 예수는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내 안에서 살고, 믿으면 죽어도 영생한다”고 했지만, 그 ‘나’는 이제 예수가 아니라 기호가 돼버렸다. 호르헤 신부가 예수를 절대적인 진리로 믿었다면, 월리엄 수도사는 그 진리란 이름뿐이라고 말했다. <장미의 이름>이 월리엄과 호르헤의 대결을 통해 우리에게 깨우쳐 준 진리는 진리란 알고 보면 이름뿐인 데, 그 진리라는 허상에 얽매이면 사라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 권처럼 자기 뿐 아니라 남을 파멸시키는 악마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악마로 만드는 것은 호르헤 신부가 휘둘렀던 권력이다. 진리의 권력화는 근대에 이르러서도 끝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됐다. 인간이 줄기세포를 만들어서 아름다운 장미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면 인간은 행복할까. 절대 권력은 부패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지식이 권력이 될 때, 그 지식 권력은 무엇보다도 무서운 사탄이 된다. 에코는 이러한 문명사적인 비극을 중세 말의 신앙과 학문의 대립을 통해서 그려냈다. 중세에서 사탄은 호르헤 신부처럼 역설적이게도 교회에서 생겨났다면, 우리시대 악의 꽃은 교회의 도그마를 파괴한 과학 속에서 피어나고 있다. 권력과 야합한 진리는 우상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권력과 야합한 진리는 우리를 눈멀게 하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우상이 된다. 중세 말에는 교회가 진실의 눈을 가리는 권력이었다면, 황우석 교수 사태를 통해 우리는 ‘국익’이 우리의 의식과 양심을 마비시킬 수 있는 우상임을 깨닫는다. 황 교수는 ‘국익’이라는 기호를 이용해서 줄기세포 논문의 진실을 은폐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를 신봉하는 우리시대 작은 호르헤 신부들은 인터넷으로 마냥사냥을 자행했다.
김기봉/경기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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