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자 소설 <계화>
무당은 어떤 존재이며 굿은 무엇인가
25살 연주가 계화에게 내림굿 받기까지
그녀들의 사연·세상과의 화해 통해
아픔 어르고 원한 달래는 무속의 힘 그려
25살 연주가 계화에게 내림굿 받기까지
그녀들의 사연·세상과의 화해 통해
아픔 어르고 원한 달래는 무속의 힘 그려
이경자(58)씨가 무당과 굿의 세계를 천착한 장편소설 <계화>(생각의나무)를 내놓았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실존 무당 김금화씨를 모델로 한 ‘계화’와 그에게서 신내림을 받는 새끼무당 ‘연주’를 주인공 삼아, 미신으로 치부되기 일쑤인 무속에 대한 온당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인다.
작가는 지난 2003년에 내놓은 장편 <그 매듭은 누가 풀까>에서도 서사무가(敍事巫歌)를 연출하는 무용가 교수를 통해 무속의 치유적 성격을 부각시킨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소설가 황석영씨는 장편 <손님>에서 죽은 자를 천도시키는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소설의 형식적 바탕으로 차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화>에서 이경자씨는 무속의 문학적 수용에 관한 이전의 시도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굿청 한복판으로 독자들을 끌고 들어간다. 독자들은 작가의 안내에 따라 무당의 사설과 공수를 듣고 춤사위를 보며 그가 행사하는 치유와 경계의 현장에 입회하게 된다.
소설은 스물다섯 살 젊은 여자 연주가 ‘신어미’ 계화에게서 내림굿을 받는 과정을 얼개 삼는다. 이 과정을 통해 꽃처럼 젊고 예쁜 여자가 어찌 해서 무업(巫業)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기구한 사정이 소개되고, 아울러 신어미 계화 자신의 무속 입문 과정 역시 간략하게 서술된다. 계화와 연주 모두 세습무가 아닌 강신무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무당이 되는 과정은 의지적 선택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떠밀림의 결과로 설명된다. 그리고 그들을 무속의 길로 떠미는 힘은 다름 아니라 그들 자신이 겪어야 했던 말 못할 수모와 고통임이 드러난다. 연주가 계화에게서 내림을 받을 찰나를 두고 작가가 “말로 할 수 없는 수모와 고통과 질병으로부터 한 생명이 꺼풀을 깨고 나와 무당이 되려는 순간”(80쪽)이라 표현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무당이란 어떤 존재인가.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 아니면서 귀신이어야 하는”(24쪽) 존재이며 “세상은 말로써 통하지만 말로는 통하지 않는 세상을 사는 인생”(64쪽)이 곧 무당이다. 사람과 귀신의 중간에 서서, 말은 말이되 사람의 말이 아닌 귀신의 언어를 부려야 하는 존재가 곧 무당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굿은 무엇일까.
인간문화재 김금화씨 모델
“굿은 무릇 만물을 살리는 일이었다. 고픈 배는 채워주고 아픈 사람은 낫게 하고 분(忿)에 치인 사람은 후련하게 하고 무섬증은 가셔주고 우울은 뚫어주는 것이었다.”(41쪽)
무당은 물론 굿을 주재하는 영적 존재이지만 남의 상처를 치유하고 울분을 풀어 주기에 앞서 그 자신 극심한 상처와 분노에 치인 가엾은 인간이기도 하다. 무당의 치유 능력이 자신이 몸소 겪은 고통과 상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연주가 계화에게서 내림굿을 받는 과정은 무엇보다 연주 자신의 묵은 상처를 씻어내고 아픈 과거와 화해하며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용서하는 절차를 수반한다.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먼저 씻어 내고서야 비로소 남의 상처 역시 돌보고 아물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할머니의 학대가 원인이 되어 친어머니를 병으로 잃은 뒤 아버지의 무관심과 계모의 구박에 고통 받던 어린 시절의 연주를 위무하는 대목을 보라. 여기서 어린 연주는 모든 고통 받는 어린아이들의 대표자가 된다.
“연주를 뒤덮고 있던 아기들, 어린아이들, 눈이 멀고 귀가 멀고 말 못하는 아이들, 손가락이 붙은 아이, 발가락이 엉긴 아이들, 빛을 보지 못하는 아이들, 울지 못하는 아이들, 웃음을 잃은 아이들이 연주가 춤을 출 때마다 먼지처럼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내렸다.”(160~161쪽)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 연주는 거기서 더 나아가 명백한 피해자인 어머니는 물론 가해자일 수도 있는 아버지와 할머니까지 감싸안는다. 가해자 역시 또 다른 피해자라는 거룩한 깨우침이 시킨 일이다. 연주는 자신 속에 어머니와 할머니가 분별과 다툼 없이 들어와 있음을 깨닫는다.
“소설가도 무당하고 비슷하네”
“삶의 갈피에 스민 죽음처럼, 죽음의 갈피에 스민 삶처럼, 연주는 이미 죽은 할머니와 어머니 속에 스민 자신을 만나고 있었으며 자신 속에 스민 할머니와 어머니의 죽음과 삶을 되살리고 있었다.”(221쪽)
내림굿의 와중에 연주 어미 역을 맡은 신어미 계화는 연주에게 “어미가 네 안에 있으니 나 그립거든 너를 극진히 보살피고 아껴라”(246쪽) 당부한다. 계화의 이런 당부는 연주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져, 굿의 말미에서 연주 자신이 굿청에 입회한 대중을 향해 동일한 당부를 하도록 만든다: “여러분 부디 자기 자신 용서하시고 존중하시고 사랑하세요!”(274쪽)
소금 맞은 지렁이처럼 제 상처에 진저리치고 몸부림치던 연주가 자신을 사랑하고 남들에게도 자중자애할 것을 당부하게끔 된 것이 굿의 기적적인 힘이다. 대체 굿이 무엇이관데? 그에 대해 직접 답하기보다는 계화와 연주가 굿청의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말을 소개하도록 하자. 굿을 삿된 예언이나 음험한 협박쯤으로 생각하고 있던 이들이 새겨 들을 법하다.
“하늘 아래 어느 인간이 높고 낮으냐! 누가 잘나고 누가 못났느냐! 왜 서로 욕심 쓰고 상처 주느냐! 너희가 정으로 태어났거늘 정을 어디에 팽개쳐 버리고 모두들 서로를 물고 뜯느냐! 어찌 서로를 능멸하느냐! 더 늦기 전에 부디 서로를 아끼고 서로를 보살펴라….”(267~268쪽)
“우리가 누구의 자손입니까. 저 하늘, 이 땅 저 나뭇가지 위의 우짖는 새, 개미, 지렁이, 어느 하나 필요 없이 생긴 목숨 없습니다. 누가 누구보다 더 잘나고 못나지 않았습니다.”(274쪽)
책 뒤에 붙인 ‘작가의 말’에서 이경자씨는 “소설가도 무당하고 비슷하네. 인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게”라는 김금화 무당의 말을 소개하고 있다. 상황의 재현과 해석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 그리고 그 사랑의 세계관에 있어 소설과 굿은 과연 통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소설 <계화>의 모델인 무당 김금화를 취재하던 1980년대 중반, 경기도에 있는 한 천신굿당에서 무당의 무복을 빌려 입은 소설가 이경자씨가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경자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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