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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전생의 연인, 현생의 친구

등록 2020-03-26 17:55수정 2020-03-27 02:41

[책&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한정현,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

<문학동네> 2020년 봄호

“그러게. 그것은 정말 옛날이야기일까.” “아니면?” “우리의 이야기일까.”

당연하거나 일반적이라고 받아들여 왔던 일들이 사실은 한 시대의 관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를테면 봉건적이라 말해지는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사실은 유교 사회였던 조선시대 이후 굳어진 것이라든가, 그 이전에는 과부의 재가가 권장되었고 더 이전에는 동성 간의 사랑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든가 하는. 이런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질서를 거스르는 용기가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장기적 호흡의 체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이미 과거와 현재 사이를 한 시대의 관습이 강철 둑처럼 가로막고 있고, 또 한 시대가 지나면 지금의 흐름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때 “그것은 정말 옛날이야기일까?” “아니면?” 하는 질문의 태도가 중요하다. 그리고 작가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낙관하자.” 지금 이름없는 것이 이름을 가지는 때가 올 것이므로.

다양한 재해석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친일파 아니면 독립투사의 시대로 이해되는 식민지 시대를 작가는 어지러운 풍속의 시대로 재현한다. ‘에로, 그로, 난센스’(에로스, 그로테스크, 난센스)의 대유행, 남장 여자와 여장 남자가 속출하고 엽기적 살해와 동반 자살의 소문이 끊이지 않던 그 풍경은 요약할 수 없는 제국과 식민의 이면이기도 하다. 작가의 재현은 풍속의 교란과 여성의 문란만을 부각하며 그들의 삶을 가십으로 소비하고 훈계했던 당대 남성 기자들의 시선을 따르지 않는다. 제국은 위생박람회라는 이름으로 식민지를 미개의 풍속으로 전시하면서 식민지인들에게 국민 등록을 강요하였고, 그 등록은 통제와 감시와 동원의 토대가 되었다. 전쟁에 동원할 군인이 필요했으므로 남성과 여성의 성별을 분리하면서 남성이 되고 싶은 여성과 여성이 되고 싶은 남성을 변태로 규정했던 제국의 질서가 그 풍속에는 내재해 있다. 의사가 되고 싶어 했던 미혼모의 딸과, 과학소녀가 등장하는 소설을 쓰고 싶어 했던 남장 여성의 욕망은 그 강제된 풍속을 뚫고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 열거된 참고문헌은 이 소설의 일부다. 학자들이 가십성 기사의 행간을 읽고 신문의 광고면을 뒤지며 한 시대를 재구성했다면 작가는 그 자료들을 지금 여기의 젠더와 사랑으로 서사화한다. 조선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간 안나와 경아(경준) 커플과 미국에서 만나 한국행을 결정한 메리와 수연 커플은 전생의 연인, 현생의 친구로 혹은 전생의 친구, 현생의 연인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독자들이 “그것은 정말 옛날이야기일까?”라는 질문으로 이 협업에 동참하면서 소설의 세계는 더 넓어질 것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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