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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거리두기의 상상력

등록 2020-04-24 06:00수정 2020-04-24 11:20

[책&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목소리를 드릴게요
정세랑 지음/아작(2020)

외출하지 않고, 약속도 잡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미뤄 뒀던 일들을 해보리라 계획했지만 우울과 무기력만 늘어갈 뿐, 속도가 나지 않는다. 결국 ‘나를 위한 시간’이란 타인과 만나는 시간에 기대어 생겨나는 것이었다.

정세랑의 ‘에스에프(SF) 단편’을 모아 놓은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읽으며 거리 두기와 연대 사이의 긴장을 생각한다. ‘리셋’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고 무책임한 쓰레기만 끝없이 만들고 있”는 인류는 외계에서 온 거대한 지렁이들에게 공격당한다. 거대 지렁이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먹어 삼키고 그것을 거대한 분변토로 토해 놓는다. 거대 지렁이는 외계에서 온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인류가 보낸 것이었다. 살아남은 인간들이 다른 지구를 만들었다. 거대 지렁이들이 파 놓은 굴을 이어 도시를 건설하고 지상을 다른 종에게 내어 주면서 공존했다. 리셋 원년, A.R.(After Reset?) 2년, A.R. 74년으로 나누어진 이야기 모음은 그러므로 지구 멸망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미래의 인간들이 지구를 망하게 한 과거의 인간들을 원망하기보다는 신뢰하며, 다른 지구를 만들기 위해 그들과 연대하는 이야기이다. 과거와 미래, 인간과 다른 종의 연대가 가능하다고, 읽는 순간만큼은 믿고 싶어진다.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자신도 모르는 새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인자를 가진 인간들을 격리해 놓은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다. 타인의 폭력성을 자극하는 목소리를 가진 인간, 머리카락으로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그것을 이루어지게 하는 인간들은 괴물이라 불린다.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보다는 낫다고, 갇혀 있을 뿐 그다지 불편한 것이 없는 수용소에서 괴물들은 오히려 안정적이다. 그러나 “세상은 원래 아주 이상한 곳이었고, 그들이 더한 것은 그저 미량의 광기라는 생각”으로 그들은 성대 제거나 제모를 감수하고 수용소 밖으로 나간다. 이상한 곳에서, “닮은 대상이 아니라, 닮지 않은 대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7교시’)다면, 타인을 위해서 나의 위험한 것들을 항상 돌아보아야 한다. 나의 위험에 대한 경계야말로, 닮지 않은 대상을 사랑하기 위해 거쳐야 할 필수적인 단계가 아닐까.

방역과 거리두기가 생활화된 일상에서 거대 지렁이나 바이러스의 출몰이 에스에프 소설 속의 판타지 같지만은 않다. 마스크를 쓰고 눈을 마주치며, 위험할지도 모르는 내 것으로부터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서로 애쓰고 있다는 생각에 가끔 울컥하기도 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타인을 보균자나 위험 전파자로 간주할 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상상력은 격리를 넘어 더 먼 곳으로 가 닿아야 하고, 이상한 곳에서의 연대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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