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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일본 극우의 역사부정 속에 탄생한 ‘반일 종족주의’라는 유령

등록 2020-05-15 06:01수정 2020-05-15 10:32

이영훈의 주장은 역사학 가장한 횡포…이승만·박정희 띄우기 일환
통계 자료 자의적 해석으로 일제의 조직적 위안부 동원 사실 부정
이영훈은 ‘우리 안의 위안부’ 역사를 논의하면서 이 위안부제가 해방 후 계속되었고, 더 열악했으며, 그 책임은 누대에 걸친 가부장제의 역사와 결합한 한국의 독특한 ‘종족주의’에 있다고 주장한다. 언뜻 맞는 말 같지만 이는 일제침략을 삭제한 설명이다. 사진은 2016년 6월 서울 시민청 갤러리에서 연 ‘겹겹-지울 수 없는 흔적’ 사진전 개막에 앞서 안세홍 사진가가 아시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사진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전에서는 아시아 지역 피해 여성 75명을 찍은 사진들을 선보이고 증언 영상도 상영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이영훈은 ‘우리 안의 위안부’ 역사를 논의하면서 이 위안부제가 해방 후 계속되었고, 더 열악했으며, 그 책임은 누대에 걸친 가부장제의 역사와 결합한 한국의 독특한 ‘종족주의’에 있다고 주장한다. 언뜻 맞는 말 같지만 이는 일제침략을 삭제한 설명이다. 사진은 2016년 6월 서울 시민청 갤러리에서 연 ‘겹겹-지울 수 없는 흔적’ 사진전 개막에 앞서 안세홍 사진가가 아시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사진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전에서는 아시아 지역 피해 여성 75명을 찍은 사진들을 선보이고 증언 영상도 상영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기고·‘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 비판

‘반일 종족주의’란 말이 한국과 일본에서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이영훈(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교장)이 만든 신조어다. 거짓말 문화, 벌거벗은 물질주의와 샤머니즘에 매어 있는 종족의 적대 감정이 이웃 일본에 향한 것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단어라 한다. 간단히 말해 역사와 영토 문제에 대해 한국의 ‘반일’ 감정만 문제 삼고, 한국의 민족주의를 ‘종족주의’로 폄하한 것이다. 이영훈 등 한국의 역사부정론자는 식민과 전쟁의 피해자 위치를 버리고 일본제국주의의 가해자 시선에 스스로를 동화한 다음 자기 부정과 자기 혐오를 하고 있는 셈이다. 왜 그럴까?

이영훈은 일본 <엔에이치케이>(NHK)와의 인터뷰에서 ‘친일파’라는 공격에 대해 “그럼 넌 반일 종족주의자”라는 반격이 가능해졌다고 자부한 바 있다. 중국·북한보다 미국·일본과 친한 게 낫다며 스스로 친일파를 자처하고 이를 애국의 징표로 여긴다. 그 밑에는 ‘반문(재인) 연대’의 정동이 깔려 있다. 지난해 9월 류석춘 연세대 교수가 자신의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너무나 진지하게 말했던 것도 단지 ‘망언’으로 넘길 게 아니라 이런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 류석춘에게 일본군 ‘위안부’는 자발적인 ‘매춘부’였고, “종북단체” 정대협에 의해 조정당해 피해자인 척하는 할머니들이다. 그는 사실에 입각한 역사를 보자는 어찌 보면 상식적인 주장을 하면서, 돌연 <반일 종족주의>를 읽으면 그걸 다 알 수 있게 된다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구체적으로 류석춘이 말하는 사실이란 어떤 걸까? 이영훈의 주장대로, 일본군 ‘위안부’는 강제연행되지 않았고 공창제의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개인 영업과 자유 폐업을 할 수 있는 돈벌이가 좋은 매춘부였지 성노예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올해 초 나는 <탈진실의 시대, 역사부정을 묻는다: ‘반일 종족주의’ 현상 비판>을 출간하고, 이영훈의 주장이 왜 ‘기본 사실’이 아닌지를 비판적으로 논증·예증했다. 이를 위해 일본 극우(특히 교과서 우파)의 역사부정론이 이영훈의 반일 종족주의 프레임으로 어떻게 각색되고 비틀렸는지, 이런 앙상한 주장과 왜곡된 논리가 어떤 배경과 맥락에서 출현했는지 살펴봤다. <반일 종족주의>는 식민지 근대화, 이승만의 건국과 박정희의 산업화만을 높이 평가한 뉴라이트교과서·국정교과서 시도의 연장에 있었다. 이는 이번에 새로 출간한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의 발행일에서도 확인된다. “2020년 5월16일 초판 1쇄”. 이영훈이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 책으로 무엇을 기념하겠다는 건지 드러낸다.

이렇게 보면 이영훈이 <…투쟁>에서 “역사가는 당대의 그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묘사할 뿐”이라며 역사가는 재판관이 아니라는 주장은 참 기만적이다. 그가 관여한 두 역사교과서와 ‘반일 종족주의’ 시리즈야말로, 그의 말을 돌려주면, 역사학을 가장한 횡포가 아닐까. 사실이 승리한다고 말하면서 이승만 정신도 마찬가지라는 말은 그들만의 역사적 평가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이라고 우기고 있다.

이영훈은 <반일 종족주의>에서 “빈곤계층의 여인들에게 강요된 매춘의 긴 역사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제만 도려낸 가운데 일본 국가의 책임을 추궁하지 말라”고 쓴 바 있다. 그는 ‘우리 안의 위안부’ 역사를 논의하면서 이 위안부제가 해방 후 계속되었고, 더 열악했으며, 그 책임은 책임은 누대에 걸친 가부장제의 역사와 결합한 한국의 독특한 ‘종족주의’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안부’제는, 그게 미군·유엔군·한국군 위안부든 뭐든 간에, 이승만 정부가 불법적으로 ‘묵인 관리’해서 계속된 것이다. 휴전 후 이승만 정부와 군이 설립한 위안소는 사라졌지만 전염병예방법 시행령 등 관계 법제와 국가의 행정 작용 아래에 ‘위안부’ 용어는 주로 미군 상대 기지촌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살아남았다. 이걸 두고도 이승만의 신봉자인 이영훈은 여성들이 국가에 의해 보호받지 못했다는 식으로 국가 책임의 소재를 흐릿하게 만들고, 그 대신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와 종족주의에 책임을 전가한다. 게다가 일본군 ‘위안부’ 때가 성병, 임신 피해, 업주와의 관계, 소득 수준 등에서 더 나았다는 전도된 주장을 <…투쟁>에서도 반복한다.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연행과 업자 문제에 대해서도 이영훈은 같은 수법으로 왜곡된 논리를 펼친다. 심지어 그는 자기를 비판하는 논자들의 문장을 왜곡하거나 맥락 없이 선별 착취해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이용한다. 예컨대, 그는 윤명숙의 글에서 “일본군이 총검을 앞세워 처녀를 끌고 가는 일은 없었다. 영화의 그런 장면은 좀 지나쳤다”고 직접 인용했는데, 원래 윤명숙의 문장은 “일본 군인이 총검을 앞세워 조선인 처녀들을 끌고 가는 모습이 보편적이었던 것처럼 인식된 건 지나쳤다”이다. 윤명숙의 논의는 ‘아예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례들이 있고, 다만 보편적이진 않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영훈은 이를 왜곡했다. 또한 이영훈은 “관헌에 의한 직접적인 강제를 입증한 문서자료가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고 와다 하루키 교수의 말을 따오는데, 원래 그런 일이 없기 때문에(정책도 지시도 없기 때문에) 증거가 없다는 식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활용한다. 그러나 와다 하루키의 주장은 군 ‘위안부’의 동원은 국가의 조직적 통제로 이루어진 것이고, 민간업자도 그 통제의 일부였다는 것이지만, (일본 본토와 달리)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는 이를 분명히 입증하는 공문서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 공문서를 만들 필요도 없이 강제동원이 이루어졌거나 그런 공문서가 있었는데 조직적으로 폐기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다.

2016년 6월 서울 중구 옛 통감관저터에서 연 서울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기공식 장면.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2016년 6월 서울 중구 옛 통감관저터에서 연 서울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기공식 장면.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통계 해석과 활용도 마찬가지다. 이영훈은 불완전한 통계, 일부의 사례를 선별해 전체를 왜곡하고, 자의적으로 분석해 이것을 ‘기본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연행·강제동원의 문제가 당시 발생했던 약취(본인의 의사에 반해 폭행이나 협박을 수단으로 여성을 지배하에 두면서 동원)와 유괴(달콤한 말로 속여 여성을 동원) 범죄의 문제로 반론이 쟁점화되자, 이영훈은 “약취·유괴 범죄의 검거, 검찰 송치 및 불기소 추이” 통계를 제시한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이렇다. 1929~30년에 약취·유괴 범죄가 피크를 이루다가 그 후 하락했고, 위안소가 본격적으로 설치된 1937-38년, 전쟁이 태평양과 동남아로 확장된 1941-42년 이후에도 유의미한 변화 없이 하락했다는 거다. 그러면서 이 범죄가 “주로 하층민의 빈곤에 기인한 사회문제”이고, 1930년대부터 식민지 근대화와 생활수준이 개선되면서 약취·유괴 범죄가 줄어든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영훈이 제시한 건 조선총독부통계연보의 “범죄검거사건 처분” 통계에서도 형사범죄 중 약취·유괴 항목만 추려낸 것이다. 사실 통계 자료를 보면, 약취·유괴 뿐 아니라 전체 형사범죄 통계 추이가 1930년 피크였다가 그 후 하락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여러 연구 질문과 가설이 나와야 하는데, 이영훈은 곧바로 사회경제적 요인과 변화로 연결 짓는다. 그러나 식민지 형사사법 전공자라면, 형사 정책 또는 특정 범죄 검거 및 기소에 대한 형사 방침의 변화 등 형사사법 영역의 독자성을 고려해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군 ‘위안부’ 동원과 직결돼 있는 약취·유괴 통계에 1937~1938년에도, 1941~42년 이후에도 유의미한 변화가 없다면, 이 범죄에 대한 식민지 형사당국의 수사·기소·재판·행형 방침과 운용 실태에 대해 관련 자료를 갖고 분석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그건 이영훈이 정해 놓은 답이 아니어서 그런지 배제되었다.

이영훈이 사례로 든 하윤명 부부 사건으로 더 깊이 논의해보자.(이영훈은 하윤명을 여인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오류다. ‘기본 사실’은 남성이다.) “색마 유괴마” 하윤명의 인신매매 악행은 당시에도 이름을 떨쳤는데 재판과 입감 기록 등이 없어서 얼마나 형을 살았는지 확인할 길이 아직까진 없다. 다만, 그가 그 후에도 싱가포르에서 군 위안소를 경영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관련해 이영훈은 하윤명이 여성을 독립 호주로 서류 위조해 “자기 의지로 위안부로 나갈 형식 요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합법(또는 합법 위장)이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았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고 추정한다. 역사 서술이라기보다 거의 소설을 쓰고 있다.

사실 이런 사례가 몇 개 있다. 그래서 이를 교차 분석해 종합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한커우에서 위안소를 경영한 이동제와 상하이에서 해군 위안소를 경영한 무라카미 도미오 사례가 있다. 특히 무라카미 도미오는 1937년 3월 초 일본 대심원(대법원) 판결까지 나 2년 6개월 징역형이 확정됐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는 실제 그 형기를 채우지 않았고, 1939년 이후에도 여전히 군 위안소를 경영했다. 일본군은 그가 유괴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도 개의치 않고 위안소 업자로 신뢰했다는 말이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1937년 말과 1938년 초에 경찰은 군의 요청으로 업자들이 움직였다는 것을 공식 확인했다. 1938년 2월과 3월 일본 내무성·육군성은 약취·유괴 등의 방법에 대해 엄중히 단속하면서 동시에 군의 체면을 생각해 업자의 선정을 주도적절하게 하고, 그 실시를 헌병·경찰과 협조해 사회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관련 자료와 연구가 그렇다면, 경찰 검거에 비해 검사 기소가 현저히 떨어지고(불기소율 80-90%), 무엇보다 경찰 검거 통계치도 일본군 ‘위안부’ 동원이 본격화되는 1937~38년, 1941~42년 이후에도 하락한다면, 다른 가설을 세워야 함이 마땅하다. 합법 또는 그 위장을 넘어 일본 및 식민지 형사사법 당국이 군의 요청으로 업자를 비호했거나 서로 공모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하윤명 같은 약취·유괴·인신매매범이자 위안소 업자들은 일본군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기에 그게 가능했을 것이다. 학계에는 이에 대한 연구들(박정애, 강정숙 등)이 이미 있다. 다만 ‘답정너’ 이영훈에게 발견되지 않을 뿐이다.

그 밖에 ‘위안부’의 고수익 주장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교육을 바라보는 그의 ‘폭력적 심성’(섬뜻하지만 그의 말을 돌려준다)에 대해서는 지면 제약으로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한다.

강성현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교수,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장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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