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열린책들·각 권 1만4800원 ‘내가 영웅처럼 살았던 전생이 있었을까?’ 눈앞에 길게 늘어선 111개의 문 중 109번째 문에서 불빛이 깜박였다. ‘겁이 좀 나는데, 어쩐다.’ 불안함을 뒤로하고 손잡이를 쥐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청회색 제복 밖으로 빠져나와있는 상처투성이 ‘내 손’이 1인칭 시점으로 보인다. 109번째 생에서의 내 이름은 이폴리트 펠리시에.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 당시 슈맹 데 담 전투에서 독일군에 맞서던 프랑스 군인이다. 한국 독자들이 사랑하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장편 <기억>(전2권)이 출간됐다. 베르베르가 2018년 발표했던 작품으로 원제는 <판도라의 상자>다. 옮긴이 전미연 번역가는 “어느 때보다 작가가 쏟았을 정성이 느껴진다.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썼다. 주인공은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인 르네 톨레다노. (그래서인지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역사 지론들이 상당하다) 센강 유람선 공연장 ‘판도라의 상자’에서 퇴행 최면 대상자로 선택된 그는 기억의 문을 열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109번째 문 너머의 생은 전장에서 목숨을 잃게 되면서 비참하게 끝이 난다. 그렇다면 나머지 110개의 문 뒤에는 또 어떤 인생들로 가득 차 있을까. 소설은 고대 로마, 캄보디아, 인도 그리고 신화 속의 섬 아틀란티스까지 시공간을 초월한 다양한 모험을 그린다. 1차 세계대전, 기원전 249년 시칠리아 드레파나 해전 등 실제의 역사가 배경으로 펼쳐진다. 속도감 넘치는 전개와 눈앞에 보이는 듯한 생생한 묘사가 특히 인상적. 책을 덮고 불을 끄면, 알 수 없는 곳에서 최면사 오팔의 질문이 들려올 것만 같다. “당신은,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나요?” 김세미 기자 ab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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