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소설 <훌>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글을 쓰고 있는 배수아(41)씨가 새 소설집 <훌>(문학동네)을 내놓았다. 배씨 특유의 몽환적이면서 사변적인 단편 일곱이 묶였다.
그야말로 배수아답다고나 할 표제작의 제목은 등장인물의 이름에서 왔다. 처음에 느슨하게 읽어 나갈 때는 ‘훌’이라는 이름이 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십상인데, 긴장하고 다시 보면 그 ‘훌’이 ‘동료 훌’과 ‘친구 훌’로 나뉨을 알 수 있다. 한 작품에서 ‘훌’이라는 기묘한 이름의 인물을 둘이나 등장시킨 데에는 분명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게다가, 일인칭 단수 대명사 ‘나’가 교묘하게 생략된 이 소설에서 감추어진 대명사의 주인인 ‘나’의 이름 역시 ‘훌’임이, 소설 끄트머리에 가서야 확인될 때 독자의 혼란은 극에 달하게 된다. 그런 혼란이 작가의 철저한 계산에 따른 것임은 분명하다. 계산은 두 가지. 독자를 향한 악의 없는 게임의 제안이 그 하나라면, 세 사람의 훌이 사실은 하나일 수도 있다는, 존재의 확장과 분화에 관한 철학적 포석이 그 둘이라 하겠다.
개별 존재들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쌍방이 하나처럼 뭉개지는 모습은 <양곤에서 온 편지>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오지 여행 도중 중병을 얻고서는 아는 이들에게 편지를 쓰는 ‘그’와 소설 말미에서 그가 보낸 편지를 받아 보는 또 다른 ‘그’ 사이의 구분은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처리된다. 앞의 ‘그’와 뒤의 ‘그’는 두 사람일 수도 있고 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 작가의 의도이리라. 그런 생각은 <회색 시(時)>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우리는 각자 고독하게 늙어갔으며 차가운 천성 때문에 주변에 가까운 사람을 남겨두지 못했다. 아니, 우리는 지금 각자 혼자 있는 것이다. 혹은 우리들, 우리들 세 사람 중의 누군가 단 한 사람만이 이곳에 앉아 있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33쪽)
이처럼 의도적인 모호성으로 무장한 배수아씨의 소설을 비교적 수월하게 읽는 한 가지 방법. 이야기 구조나 주제에 매달리지 말고 그야말로 에세이를 읽듯이 문장과 문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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