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를 분석심리학의 눈으로 들여다본 카를 구스타프 융. <한겨레> 자료사진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필생의 대작인 〈파우스트〉는 문학비평을 비롯한 수많은 분야에서 탐구의 대상이 돼 왔다. 심리학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일찍이 <파우스트>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이 저작에 관해 수많은 논평을 남겼다. 국내 분석심리학 권위자인 이부영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괴테와 융>은 융의 분석심리학을 ‘아리아드네의 실’로 삼아 <파우스트>라는 심리학적 미궁을 탐색한 책이다.
<파우스트>는 절망에 빠진 늙은 철학자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고 다시 젊어져 감각과 욕망과 야심이 시키는 대로 온갖 모험을 하는 드라마다. 이 모험을 분석심리학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대극의 갈등과 합일’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대극이란 선과 악, 빛과 어둠, 남성과 여성처럼 서로 대립하는 양극을 말한다. 인간의 무의식이 무수한 대극적 관계를 품고 있듯이, <파우스트>의 드라마도 수많은 대극 관계를 동력으로 삼아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 대극 관계는 프랙털 구조처럼 작은 대극에서 큰 대극까지 여러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파우스트가 사랑에 빠지는 여성 주인공들, 그러니까 제1부의 그레트헨과 제2부의 헬레나는 파우스트의 무의식 속 여성성인 ‘아니마’를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그레트헨과 헬레나에게 파우스트는 그들의 무의식에 깔린 남성성 곧 ‘아니무스’를 가리킨다. 이 대극은 긴장과 갈등 관계에 있지만, 온전한 인격을 형성하려면 대극은 하나로 통합돼야 한다.
<파우스트>의 가장 큰 대극은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분석심리학의 눈으로 보면 파우스트의 자아가 감당하기 어려워 무의식 속으로 묻어버린 열등한 인격, 곧 ‘그림자’에 해당한다. 이 그림자는 엄청난 악마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서, 서재 안에서 우울증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자살까지 생각하는 파우스트를 일으켜 세워 거대한 모험을 감행하게 한다. 이 악마적 힘을 지닌 그림자가 자아와 융합해 제3의 정신으로 다시 태어날 때 인격이 온전해진다고 융은 말한다. 이 힘의 긍정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처음 만나 자기를 소개할 때 드러난다. “항상 악을 원하지만 언제나 선을 창조해내고 마는 힘의 일부분입죠.” 악이야말로 선의 동력이라는 얘기다.
극의 ‘서곡’에서 하늘의 ‘주님’이 하는 말은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동행이 ‘대극의 합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음을 미리 알려준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다.” “선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다.” 악마적 힘을 승화시켜 더 높은 차원의 목표에 이르리라는 예언인 셈이다. 이런 목표는 파우스트가 하는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류 전체에게 주어진 것을 내 내면의 ‘자기’로 음미해보려네. (…) 나 자신의 ‘자기’를 온 인류의 자기로 확대하려네.” 파우스트는 온갖 것을 경험해 인류 전체를 자기 안에 품고 동시에 자신의 자아를 인류 전체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한다. 여기서 파우스트가 말하는 ‘자기’(Selbst, self)는 우리의 표층적 의식인 자아(Ego)를 뛰어넘어 무의식 전체를 의식과 통합해 이루는 ‘전체 정신’을 가리킨다. 융은 이렇게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해 온전한 전체를 이루는 것을 ‘자기실현’이라고 불렀다. <파우스트>의 드라마는 이 궁극의 목표를 향해 무의식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평생에 걸쳐 <파우스트>를 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한겨레> 자료사진
그런 자기실현의 과정은 온갖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의식은 이카로스처럼 하늘로 치솟다가 한순간에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기도 한다. 세상 모든 비밀을 꿰뚫어본 것만 같아 의기양양해진 파우스트가 “아니, 내가 신이 아닐까?” 하는 대목이 그런 상승과 추락을 보여준다. 파우스트는 자신이 신과 같은 사람이 됐다고 착각하는데, 분석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자아팽창’이라고 부른다. 무의식이 급격히 활성화하면서 자아가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그러다 다음 순간 자아의 바람이 빠져나가자 비참하게 외친다. “나는 신들을 닮지 않았다! 나는 쓰레기더미를 파헤치는 벌레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신과 벌레 사이를 오고가는 것이 인간 정신의 운동이다. 융은 이렇게 극단을 오가는 정신의 동요를 ‘에난티오드로미’라는 용어로 설명하기도 했다. 에난티오드로미란 ‘대극의 반전’을 뜻하는데, 자아의식이 한편으로 치우치게 되면 무의식에서 그 반대 극이 똑같이 강력하게 형성돼 자아의식을 사로잡게 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런 ‘대극의 반전’을 통해 균형을 잡게 된 자아는 한걸음씩 대극 통합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이 조절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자아팽창이 극한에 이르게 되고 풍선이 터지듯 파멸로 떨어지고 만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주인공의 영혼을 구제해 천상으로 이끌어 올린다. 하지만 융은 파우스트가 걸어간 길이 진정한 자기실현의 길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다. 파우스트는 바다를 막아 넓은 간척지를 만들면서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들과 살고 싶다”고 꿈을 이야기하지만, 그보다 앞서 죄 없는 노부부 필레몬과 바우키스를 죽이고 그 악행을 끝내 참회하지 않는다. 젊은 날 <파우스트>를 읽고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가 내 안에 들어와 나와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한 융은 훗날 “마치 나 자신이 두 늙은이를 죽이는 것을 도와주기라도 한 것 같은 죄책감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파우스트>는 ‘자아’가 ‘자기’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자기실현의 드라마이지만, 그 실현은 온전하지 못하다. 이 책의 지은이도 융과 마찬가지로 극의 결말에 강한 유감을 드러낸다. “<파우스트>는 아직 끝난 이야기가 아니며, 파우스트가 진정한 자아로 재탄생하려면 다시 죽고 살아나기를 되풀이해야 할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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