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프랑스 ‘노란 조끼 운동’ 예견한 바로 그 소설

등록 2020-07-17 06:00수정 2020-07-17 10:09

중년 남성 성생활 흥망사 다룬 우엘벡 장편 ‘세로토닌’
프랑스 노동자들의 유혈 시위 ‘노란 조끼 운동’을 예견했다고 해서 화제를 낳은 소설 <세로토닌>의 작가 미셸 우엘벡. 소설 속에서 의사 아조트 박사는 주인공 플로랑에게 이렇게 말한다. “선생은 현재 깊은 슬픔으로 죽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Photo Philippe Matsas (c) Flammarion
프랑스 노동자들의 유혈 시위 ‘노란 조끼 운동’을 예견했다고 해서 화제를 낳은 소설 <세로토닌>의 작가 미셸 우엘벡. 소설 속에서 의사 아조트 박사는 주인공 플로랑에게 이렇게 말한다. “선생은 현재 깊은 슬픔으로 죽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Photo Philippe Matsas (c) Flammarion

세로토닌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문학동네·1만5500원

미국의 계간지 <보스턴 리뷰>가 지난 5월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의 소설 <세로토닌> 영어판 서평에 붙인 제목은 ‘극우의 예언가’였다. 우엘벡은 앞선 소설들에서 이슬람 혐오와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 국수주의 등을 한껏 과시한 바 있다. 프랑스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는 상황을 가상한 그의 전작 <복종>이 나온 2015년 1월7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그의 캐리커처를 표지에 실은 시사 잡지 <샤를리 에브도> 사무실을 대상으로 테러를 저질렀다. 프랑스에서 지난해 1월 초에 발간된 <세로토닌>은 그 전해 11월 유류세 인상에 항의해 노동자들이 유혈 시위를 벌인 ‘노란 조끼 운동’을 예견했다고 해서 또다시 화제가 되었고, 무려 32만부나 찍은 초판이 일주일 만에 매진되는 등 뜨거운 반응을 낳았다.

<세로토닌>의 주인공인 사십대 중반 남성 플로랑은 노르망디에서 목축업을 하는 농업대학 동창 에메릭을 찾아가는데, 유럽연합의 우유 쿼터제 포기로 타격을 입은 에메릭과 동료 목축업자들은 소총과 사냥총, 로켓포 등으로 무장하고 기동경찰에 맞서 유혈 시위를 벌인다. 광대한 영지를 지닌 귀족 집안 출신인 에메릭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노르망디 젖소들만 키우지만, 값싼 수입 유제품의 공세에 적자를 면치 못한다. 결국 버티다 못한 아내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치고, 절망한 그는 시위 현장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프랑스 낙농업자 수는 현재 육만을 조금 웃도는데, 내 생각에 십오 년 뒤엔 이만 정도가 남을 것 같아. 말하자면 작금의 프랑스 농업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이라고 할 수 있어.”

프랑스 농산부의 위촉직 공무원으로 일했던 농업 전문가 플로랑은 시위를 앞둔 에메릭에게 이렇게 비관적인 견해를 밝힌다. 그는 나아가 에메릭과 그의 동료들에게 목축업을 그만두라는 조언을 한다. “이번에는 정말이지 나의 직업적인 실패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기분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 자신을 파괴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가 농산부에서 일했던 시절을 돌이키며 “시장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는 인간들과 대립했”노라고 밝히는 대목은 이 극우 예언가가 “왜 그토록 많은 좌파들에게 호소력을 지니는가” 하는 <보스턴 리뷰>의 서평 한 대목에 대한 답변처럼 읽히기도 한다.

<세로토닌>이 불러 일으킨 센세이션은 주로 ‘노란 조끼 시위’와의 연관성에 말미암은 것이지만, 그 부분은 이 소설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절반은 주인공 플로랑이 느끼는 무력감과 좌절에 할애된다. 소설 제목 ‘세로토닌’은 일명 ‘행복 호르몬’으로, 플로랑이 복용하는 항우울제 캅토릭스가 이 호르몬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렇게 약물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플로랑은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상태. 그 점에서는 우엘벡의 기존 소설의 비슷한 중년 남성 주인공들과 통한다.

“죽을 이유가 없는 것처럼 살 이유도 없었다.”

플로랑의 현재 상태를 요약하는 문장인데, 그가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까닭을 한마디로 하자면 ‘사랑의 상실’이라 할 수 있다. 사랑보다는 섹스를 앞세우고 중시했던 우엘벡 소설의 이전 주인공들과 달리 <세로토닌>의 주인공 플로랑에게는 사랑이—또는 사랑을 전제로 한 섹스가 행복을 보장하는 조건이 된다.

“사랑은 어쨌든 우리가 지상에 존재하는 시간들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어쩌면 세상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유일무이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관한 이런 예찬이 다른 이의 입에서 나왔다면 단지 뻔한 클리셰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엘벡이 이렇게 말하면 어쩐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사실 그에게 더 어울리는 말은 사랑보다는 섹스라 할 수 있겠는데, “섹스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고, 섹스 없이는 더는 아무것도 성립될 수 없었다”는 문장이 전형적이다. <세로토닌>에 구강성교와 항문성교는 물론이고 집단성교와 수간, 소아성애 등이 노골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섹스에 대한 우엘벡의 이런 의미 부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미셸 우엘벡. Photo Barbara d'Alessandri (c) Flammarion
미셸 우엘벡. Photo Barbara d'Alessandri (c) Flammarion

주인공 플로랑이 스무 살 아래 동거인인 일본 여성 유주와 헤어질 결심을 하는 것도 둘 사이에 사랑이 끝났다는 판단 때문이다. 유주의 난교 파티 영상을 확인한 일을 계기 삼아 그는 ‘자발적 실종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유주로부터 도망침은 물론 세상에서 자신의 흔적과 존재 자체를 지우기로 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과거에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들을 다시 만나 볼 계획을 세운다. “나의 페니스를 떠받들어주고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해주었던 여자들을 죄다 다시 만나보고 싶었던 것이다.” 항우울제 캅토릭스가 리비도 상실 및 성기능 장애라는 부작용을 수반하는 만큼, “기능 종료 조짐이 뚜렷해진 나의 페니스와의 영원한 작별을 기념하는 작은 의식을 거행하려” 한 것. 소설은 우울증과 무력감으로 소멸을 향해 가는 플로랑의 현재와, 그가 사랑하는 여자들을 만나고 헤어졌던 과거의 일들을 교차시키며 한 중년 남성의 성생활 흥망사를 기록한다.

우엘벡 특유의 독설과 혐오, 냉소는 여전하다. 파리를 가리켜 “혐오스러운 환경주의자 부르주아들이 창궐한 이 도시”라 표현한다거나, “말은 흔히 사랑이 아닌 분열과 증오를 조장”한다는 궤변(?), 또는 “사람들이 충고를 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 충고를 따르지 않기 위해서”라는 역설적 통찰은 비록 주인공 플로랑의 생각으로 그려지지만 우엘벡 자신의 판단이라 보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와 남을 가리지 않는 신랄하고 파괴적인 언설을 만나는 것은 우엘벡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재미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