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제임스 볼드윈 지음, 고정아 옮김/열린책들·1만3800원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제임스 볼드윈 지음, 박다솜 옮김/열린책들·1만2800원
미국의 흑인 작가 제임스 볼드윈이 흑백 차별 현실을 고발하고 대안을 모색한 소설과 에세이 두 권이 한꺼번에 출간되었다. 사진은 지난 4일 미국 수도 워싱턴의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광장에서 백인 경찰에 체포되는 흑인의 모습. 워싱턴/AFP 연합뉴스
제임스 볼드윈(1924~1987)는 미국의 흑인 동성애 작가다. 동성애자 권리운동이 본격화하기 훨씬 전인 1956년에 나온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 <조반니의 방>은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백인 중산층 미국 남성과 이탈리아인 남성 사이의 사랑과 욕망을 그렸다. 볼드윈은 1948년 인종 차별을 피해 프랑스로 거처를 옮겼으며 그곳에서 장 주네, 앨런 긴즈버그, 말런 브랜도, 해리 벨라폰테 등 예술인들과 교유했다.
새로 번역돼 나온 그의 소설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과 에세이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는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일에 따르는 고통과 시련 그리고 그에 맞서는 투쟁 의지와 희망의 근거를 담은 작품들이다. 지난 5월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새삼 관심이 높아진 미국 내 흑인 차별과 억압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책들이다.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은 <문라이트>의 감독 배리 젠킨스가 2018년에 만든 동명 영화의 원작이기도 하다. 1970년대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젊은 흑인 남녀가 겪는 차별과 억압을 그렸다. 열아홉살 티시와 스물두살 포니는 어릴 적부터 친한 이웃이었고 어느덧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포니가 강간 혐의로 체포된다. 소설은 티시가 감옥으로 포니를 면회 가서 그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나는 포니가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자랑스럽다. 그는 남자다”라는 티시의 생각은 포니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을 뒤집어쓰고 갇혔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포니가 언제나처럼 미소 띤 얼굴로 주먹을 들었고, 나도 주먹을 들었다”라는 문장은 조지 플로이드 사건 뒤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시위의 상징처럼 된 몸짓을 떠오르게도 한다.
포니를 잡아 가둔 혐의가 어떤 것인지는 소설이 진행되면서 차차 드러난다. 그는 로저스 부인이라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여성을 강간한 혐의로 체포된 것인데, 그것은 순전히 그에게 악의를 품은 백인 경찰의 모함이었다. 그러나 그를 범인으로 지목한 로저스 부인이 돌연 행적을 감추면서 상황은 점점 암울해진다.
“그는 누구의 깜둥이도 아니었다. 이 얼어 죽을 자유 국가에서 그것은 범죄였다. 이 나라에서 깜둥이는 누군가의 깜둥이가 되어야 한다. 누구의 깜둥이도 아닌 깜둥이는 나쁜 깜둥이다.”
사실 포니는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난 혼혈이지만,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많이 닮아서 흑인에 가까운 외모를 지녔다. 반대로 그의 두 누나는 어머니를 닮아서 “피부색이 밝고 머리카락은 찰랑거렸다.” 포니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티시가 양쪽 식구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 피부색을 경계로 일종의 전선이 형성된다. 포니의 백인 엄마가 티시를 향해 “네 안에는 악마가 있어”라며 저주의 말을 퍼붓고 두 딸이 그에 동조하는 반면, 티시의 부모와 언니 그리고 포니의 흑인 아버지는 그 반대편에 서서 포니와 티시 그리고 뱃속 아이를 위해 싸울 것을 다짐한다.
포니의 친구인 대니얼은 마리화나를 피우다가 붙잡혀 가서는 엉뚱하게도 자동차 절도범으로 2년의 옥살이를 하고 나온다. “처음에는 마리화나로 잡아가더니 자동차 절도죄도 덮어씌웠어. 내가 본 적도 없는 자동차를. 그냥 그날 자동차 절도범이 필요했던 것 같아.” 이렇게 전과자가 되었던 대니얼은 감옥에서 자신의 진짜 ‘잘못’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깨닫는다. 흑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죄였던 것. “감방에서 맬컴 엑스 같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게 됐어. 백인은 악마야. 인간이 아니야.” 역시 자신이 하지도 않은 강간죄로 감옥에 갇힌 포니가 “내가 무엇인가 깨달아야 했고, 그건 여기 들어오지 않고는 볼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몰라”라고 말할 때, 그는 친구 대니얼이 한 말을 자기 식으로 되풀이한 셈이다.
한편 로저스 부인을 찾아 푸에르토리코에 간 티시의 엄마는 쓰레기장 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열악한 상황을 보며 이런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스페인어를 못 하고 그 사람들은 영어를 못 하지만, 같은 쓰레기 더미에 있었지. 같은 이유로. 이유가 같았어. 그걸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이 누구건 그 사람은 사슬에 묶인 채 고향에 끌려가서 죽는 게 옳았어.” 소설 말미에 볼드윈이 ‘1973년 10월12일(콜럼버스의 날)’이라고 작품을 탈고한 날짜를 밝힌 것은 미국을 인종 차별의 지옥으로 만든 콜럼버스 이후 백인들의 원죄를 상기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는 ‘나의 감옥이 흔들렸다’와 ‘십자가 아래에서’ 두 에세이로 이루어졌다. ‘나의 감옥이…’는 1963년 노예 해방 100주년을 맞아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고, ‘십자가 아래에서’는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환멸을 느끼고 뛰쳐나온 자신의 이력과 미국 흑인의 분리 독립을 주장한 이슬람 국가 운동과의 만남을 회고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흑백 갈등의 해결책을 제시한 글이다. 이슬람 국가 운동은 “모든 백인이 저주받았으며 악마이고 곧 멸망할 거라는 역사적·신학적 증거를 제시”하며 흑인의 독립을 주창했다. 공교로운 것은 나치를 추종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 가운데 일부도 흑백 분리라는 점에서는 이슬람 국가 운동과 이해를 같이했다는 것. 볼드윈은 흑백 분리라는 생각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흑인과 백인의 상호 이해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니그로는 미국의 핵심 인구이며 미국의 미래가 밝을지 어두울지는 니그로의 미래에 달려 있다. (…) 요컨대 우리 흑인과 백인은 진실로 하나의 국가를 이루기 위해 서로를 깊이 필요로 한다.”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는 ‘플로이드 사건’이 주는 교훈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