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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선조의 은광(銀鑛)

등록 2020-07-31 04:59수정 2020-07-31 10:05

[책&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명(明)은 은을 기본통화로 썼다. 조선 건국 직후부터 은의 공납(貢納)을 요구했다. 물론 금도 포함해서였다. 은과 금을 바치는 길이 열린다면 자손만대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었다. 외교력을 총동원하여 조선에는 금과 은이 나지 않는다면서 명을 설득했고 세종 때 비로소 은과 금의 공납을 면제 받았다.

임진왜란 때 명의 군대는 조선에 와서 은을 찾았다. 은광을 개발하라고 채근했고 실제 은광을 찾아다닌 장수까지 있었다. 은이 난다는 몇몇 땅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만족할 만큼 은을 캐낸 자는 없었다. 조선 정부가 은광을 알려주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은광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1598년 현재 함경도 단천(端川) 은광은 1년에 5천 냥 정도의 은을 나라에 바치고 있었고 이 외에도 함흥·정평(定平)·영흥(迎興)·갑산(甲山)도 품위가 높은 은혈(銀穴)이 허다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조선은 은광을 적극 개발하지 않았다.

은은 늘 부족했다. 부패한 명의 환관들은 병자호란 직전까지 조선에 사신으로 올 때마다 은을 쥐어짜 갔다. 나라의 재정이 바닥이 났지만, 그래도 조선은 은광 개발에 발 벗고 나서지 않았다. 1602년 선조는 은광을 열어 은을 캐자는 호조의 요청을 거부했다. 조선에 은광이 있다는 이야기를 중국의 태감(太監, 宦官)들이 듣게 되면, 그들의 탐욕을 당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선조실록>은 선조가 중국의 탐욕스러운 요구를 의식하여 은광의 개발을 거부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선조와 은광 이야기를 꺼내고 선조가 은광 개발을 거부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곧 선조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혼돈(混沌)을 파서 구멍을 내면 혼돈이 죽고, 은혈을 뚫으면 인심이 죽는다.”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에 근거를 둔 ‘혼돈’ 운운하는 말의 의미는 자연을 파괴하면 그 유기체적 생명력을 잃는다는 것이다. 은을 캐어 막대한 이익을 남기면 사람들은 이후 일확천금의 이익만을 노리게 된다. 농사를 팽개치는 것은 물론이다. 이것은 인간의 항심(恒心)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17세기 후반 조선에는 갑자기 은이 넘쳐났다. 현종·숙종조에 중국의 생사(生絲)를 가져다 일본에 팔아 막대한 은을 벌어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초 중개무역이 끊어지자 다시 은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고 북경과의 무역에 조선의 광은(鑛銀)이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정부가 주체가 되어 은광을 개발하자는 요청이 쏟아졌다. 하지만 영조는 선조의 말을 떠올리며 되레 안변(安邊)의 동광(銅鑛)도, 회양(淮陽)의 은광도 묻어버렸다.

중국과 일본의 홍수도, 한국의 7월 말 장마도,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도 궁극적으로는 기후변화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 기후변화라는 것은, 지구를 생명이 아닌 오직 자원으로, 경제개발의 대상으로 본 것, 다시 말해 혼돈에 구멍을 낸 결과가 아닌가. 감당할 수 없이 치솟는 서울의 아파트값은 은혈을 뚫은 결과가 아닐까? 과거 나는 은광을 덮어버린 선조와 영조를 부원(富源)을 걷어찬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의 사람됨도 마땅찮았다. 하지만 이 풍요로운 난세를 맞이해 은광을 덮었던 그들의 생각과 말을 새삼 곱씹지 않을 수 없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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