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의 분위기
박민정 지음/문학과지성사·1만3000원
소설집 <바비의 분위기>를 펴낸 박민정 작가가 18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사진 촬영을 위해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는 “작품을 쓸 땐 누군가를 대상화하려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셋방 살다가 집을 마련한 것 같아요. 하하.”
18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민정(35) 작가는 세 번째 소설집 <바비의 분위기>(문학과지성사)를 펴낸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아내들의 학교>(2017) 이후 3년 만에 선보인 이번 책은 2018년 제9회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 ‘세실, 주희’ , 2019년 제64회 현대문학상 수상작 ‘모르그 디오라마’ 등 7편의 단편을 한 데 모은 것이다.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그는 1980년대생 ‘영페미니스트 소설가’ 중 한 명으로 자주 거론된다. 특히 “아이엠에프(IMF) 이후 청년 세대의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특화해 그려낸다”는 문단의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성폭력과 비동의 불법 촬영물(‘모르그 디오라마’), 여성을 향한 왜곡된 시선(‘바비의 분위기’) 등 혐오와 배제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는 자신의 변화를 예민하게 읽고 있었다. “이번 책을 내면서 첫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2014)를 다시 봤다”고 했다. “초기에 낸 창작집이 겉으론 독한 스탠스를 취하지만 빨간 속살이 다 드러날 정도로 연약하게 느껴졌다면 이번 책은 너무나도 온화하게 말하지만 그때보다 독기를 더 품고 있는 듯해요.”(웃음)
‘모르그 디오라마’는 고등학생 시절 성폭행을 당한 주인공이 그 기억을 지운 채 지내다가 회사에서 불법 촬영물을 초단위로 보는 작업을 하면서 피해 기억을 떠올린다는 이야기다. 심리상담을 받은 주인공은 소설 마지막에 가서야 “나는 죽었던 적이 있어요. (나는 발가벗겨진 채 사진을 찍혔고) 그때 죽었어요”라고 고백한다. 불법 촬영물을 보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성폭력 2차 피해와 주위의 비난과 낙인 등이 얼마나 철저하게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지를 보여준다. “불법 촬영물이 돌아다니는 지금, 자기 인생의 지옥과 대면하는 사람의 이야기야말로 진정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아닌가”(<2019년 현대문학상 수상집>)라는 지은이의 말처럼, “나는 죽었다”는 말 한마디에서 오늘날의 젊은 여성들을 대변하는 주인공의 고통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표제작 ‘바비의 분위기’는 혼자 좋아하는 여성의 사진을 몰래 찍고 그를 닮은 로봇을 만드는 사촌 오빠를 둔 주인공 유미의 이야기다. 유미에게 어릴 적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촌오빠는 그 여자의 피시통신 아이디를 해킹해 사적 정보를 훔쳐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그에 관한 악질적인 소문을 퍼뜨린 사람이다.
“사촌오빠의 불행했던 성장 배경이 나오지만 그의 서사를 만들려는 게 아니라 그의 잘못을 인지하고 그것을 말하는 유미의 심리를 보여주려고 했어요. 소설에 나오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빠의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나. 그가 불행했던 것이 사실이고 그의 좌절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라는 게 가장 핵심 문장이에요.”
7편의 단편 중 “‘천사의 비밀’은 자전적 소설”이라고 말했다. 이 소설은 심리상담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와 부모의 방임 속에서 자란 상담자인 고등학생 숙희의 이야기다. “2018년 초반부터 작가와 작품 속 화자 사이의 거리 허물기를 시작했어요. 그 당시 미국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작품을 읽으며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었죠. 소설집 후반부에 나오는 ‘천사의 비밀’ ‘천국과 지옥은 사실이야’가 그 당시 썼던 작품이고, 그때 작가와 가까운 화자를 둔 자전적 소설을 쓰게 됐어요. 항상 화자와 멀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깬 시도이니 작가로서 큰 전환점이 된 거죠.”
그는 실제 있었던 일을 옮길 때 언제나 재현의 윤리를 고민한다. “예를 들어 호러의 경우 여성의 몸이 학대와 재난의 현장이 되잖아요. 그걸 보고 누군가는 트라우마와 상처를 받을 수 있어요. 작품을 쓸 때 저는 누군가를 대상화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점점 더 이런 고민과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소설 마지막은 섣불리 해피엔딩이나 새드엔딩으로 매듭을 짓지 않으려고 한다. “누군가는 제 소설이 이상한 결말이라고 하더군요. ‘언캐니’하다고 할까요. 뭔가 해결되지 않고 평범해 보이는데 왠지 낯선 느낌. 그래야 현실에서는 자기 삶의 1인칭 화자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소설집 <바비의 분위기>의 박민정 작가.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그의 소설에는 심리상담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천사의 비밀’에서 숙희가, ‘모르그 디오라마’에서 주인공 ‘나’도 상담 테이블에 앉는다. 그가 의도적으로 넣은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저 역시 상담을 받았고 그걸 통해 치유를 받았어요. 소설 속 심리상담의 공간은 한 사람이 내가 겪은 일을 정리하고 결론을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죠.”
인물들의 다양한 결을 보여주는 것도 특징이다. 국가, 세대, 계급이라는 다층적인 조건을 보여주고 그 차이를 드러낸다.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피해자화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것이다. “한 사람을 이루는 정체성은 타고난 인성이나 특별한 경험보다 계급이나 세대처럼 더 중층적인 조건들로부터 구성돼요. ‘천국과 지옥은 사실이다’에서 주인공들이 시골 면단위 출신이라는 걸 넣은 것 역시 문화자본에서 소외된 그들의 조건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죠.”
그는 아직 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원하는 만큼은 쓰지 못했으니까 사실 아직 한 줄도 쓰지” 못했다는 그는 앞으로도 여성의 삶을 그리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그동안 상상하지 않았던 기혼 여성, 유자녀 여성, 나이 든 여성에 대해 쓰고 싶어요. 제가 그동안 대학생이나 20대, 혹은 직장인들을 주로 다뤘잖아요. 특히 이모, 고모라고 불리는 이들, 그들의 이야기를 하려고요.” 올해 안으로 중편 소설 <물의 모양>과 산문집도 선보일 예정이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