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정치적 종족성과 민족주의, 그 오랜 역사와 깊은 뿌리
아자 가트·알렉산더 야콥슨 지음, 유나영 옮김/교유서가·3만2000원
1980년대 이후 역사학계에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된 것이 ‘민족(nation)과 민족주의(nationalism)’ 문제다. 민족과 민족주의가 언제 탄생했느냐를 두고 벌어진 논쟁은 유럽 사학계에서 시작돼 국내 학계에서도 격렬한 공방을 낳았다. 민족이 유구한 전통을 지닌 것이라는 ‘전통주의’ 시각은 민족이 정치적·경제적 근대화, 다시 말해 프랑스혁명과 같은 국민혁명과 자본주의의 지구적 확산의 산물이었다는 ‘근대주의’ 시각의 거센 공격을 받고 한동안 역사의 퇴물과 유사한 취급을 받았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 <1780년 이후 민족과 민족주의>,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가 그런 공격의 선봉에 선 저작이었다. 그러나 민족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이 근대주의자들의 주장은 머잖아 다시 격렬한 반격에 휩싸였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아자 가트(텔아비브대학 교수)가 동료 알렉산더 야콥슨과 함께 쓴 <민족>(nations)은 근대주의에 대한 전통주의 반격의 종합판이라고 할 만한 저작이다. 이 책은 근대주의자들이 어떤 점에서 오류를 범했는지 조목조목 짚어내고 인류사 초기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아우르며 민족이라는 실체가 형성돼 변모해 온 과정을 거시적 관점에서 상술한다. 특히 근대주의 역사학자들이 주로 유럽의 근대사를 중심으로 삼아 민족 개념의 형성을 설명하는 ‘유럽중심주의’ 오류를 저질렀다고 지적하며 시야를 지구 전체로 확대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서 민족의 역사를 살핀다. 이런 드넓은 조명을 받아 ‘민족’은 국가가 탄생하는 역사의 초기 단계에 이미 형성돼 정치적으로 커다란 힘을 발휘했으며 근대에 들어와 그 함의가 깊어지고 기능도 커진 것으로 나타난다.
이 책은 근대주의적 민족 이해가 폭증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를 20세기 파시즘과 나치즘의 창궐에서 찾는다. 공교롭게도, 민족과 민족주의를 근대의 발명품으로 해석한 일군의 역사학자들, 곧 한스 콘, 카를 도이치, 어네스트 겔너, 에릭 홉스봄이 모두 파시즘으로 고통을 겪은 유대계 이주자들이었다. 이 책은 이 학자들이 젊은 시절 민족주의 광기 속에 입은 상처가 민족과 민족주의를 근대적 상상력의 산물로 이해하는 데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이 근대주의자들은 민족주의의 탄생을 국가 엘리트들이 대중의 의식을 조작해 동원한 결과로 설명했다. 민족과 민족주의를 국민통합의 이데올로기 도구로서 창조해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런 ‘도구주의’의 허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일방적인 하향식 민족 선동 모델은 날이 하나뿐인 가위나 한 손으로 손뼉 치기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대중의 민족 정체성 없이 민족주의 선동은 먹히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 책은 이 일군의 근대주의자들이 민족이라는 쟁점을 잘못 이끌어간 데는 ‘인식론적 오류’도 한몫을 했다고 말한다. 민족에 대한 근대주의 이론을 선도한 학자들은 주로 마르크스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이었는데, 이들에게는 민족을 통시적·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인식의 틀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이 학자들은 ‘눈먼 사람 코끼리 만지기’ 설화가 알려주는 대로 코끼리의 일부를 만져보고는 그것을 전체로 그려내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인식론의 토대인 ‘개인’이나 마르크스주의적 인식론의 토대인 ‘계급’으로는 민족 형성의 근본 바탕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론적 맹목을 지은이는 이렇게 요약한다. “개념화할 수 없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방 안의 코끼리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지은이는 민족이라는 단위는 개인이나 계급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조건에서 태어난 것임을 강조한다. 인간은 본성상 모여 살 수밖에 없고 혈연적으로 가까운 것에 친밀감과 연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런 인간 본성의 발현 속에서 이미 선사시대 때부터 인간은 친족 단위, 부족 단위, 종족 단위로 결합을 키워가며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리고 국가가 형성될 때 이 종족 단위는 강력한 정치적 힘으로 등장했다. 국가와 종족은 변증법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면서 민족을 형성했다. 이런 역사적 사정을 살펴보면 민족은 이미 근대 이전에, 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시대 초기의 국가 형성과 함께 존재해 왔다. 여기서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이 전근대 왕조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이냐다. 근대주의자들은 왕조 국가는 근본적으로 민족 없는 국가라고 주장하지만, 이 책은 왕조 국가도 백성 곧 민족이 바탕을 이루고 그 위에 왕조가 들어선 것, 다시 말해 ‘민족과 결합한 왕국’으로 이해한다. 지은이는 이런 사실을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를 보면 늦어도 10세기 고려시대 때 민족적 통일 위에 왕조 국가 체제가 구축됐다는 것이다.
근대주의자들은 민족 형성의 본질적인 계기로 근대 정치혁명이 낳은 ‘평등한 시민권’과 ‘인민주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미 군주주권 시대, 곧 왕조시대에도 민족이 국가의 기틀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인민의 평등과 주권은 민족 형성의 본질적 계기가 될 수 없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인민주권은 민족이 근대적 형태로 변형되고 민족의식이 더 깊어지는 계기가 됐을 뿐이다. 인민주권과 대중정치가 민족 정체성을 낳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민족 정체성이 인민주권과 대중정치를 낳았다는 것이다.
민족과 민족주의 형성의 전체 역사를 보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동원을 위해 민족과 민족주의가 근대의 특정 시점에 발명됐다는 근대주의자들의 주장이야말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해석임이 분명해진다고 이 책은 말한다. 민족주의는 민족이 억압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해방의 힘으로 작용하며 민족 구성원의 민주화·자유화의 기폭제가 된다. 동시에 민족주의는 공격적·배타적 표출로 세계사의 재앙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은 민족주의의 이 양면을 함께 볼 것을 권하면서, 민족주의가 지닌 긍정적인 힘을 키우고 부정적인 힘을 제어하려면 민족과 민족주의가 어떤 경로를 거쳐 형성됐는지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