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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백마를 타고 오지 마세요

등록 2020-09-11 04:59수정 2020-09-11 10:14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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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화이트 호스

강화길 지음/문학동네(2020)

“백마 탄 왕자님의 의미만 쓸데없이 깊이 알게 된 것 같았다”(‘화이트 호스’). 정말 그랬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표지에 적힌 ‘화이트 호스’라는 제목을 읽었을 때도, 영어로 병기된 ‘WHITE HORSE’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도 의미가 얼른 와 닿지 않았다. ‘화이트 호스’라고 했을 때는 낯설기만 했던 단어를 ‘백마’라고 바꾸어 놓자 금세 익숙해졌다. ‘백마를 탄 왕자’가 연상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백마 탄 왕자님’의 의미를 쓸데없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에 의하면 ‘브라운 신부’의 작가 체스터턴의 시에도 밥 딜런의 노래에도 ‘화이트 호스’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그 의미는 ‘구원이나 선물’이라는 고정된 상징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종교인이었고 소설가였으며 비평가였던 체스터턴에게 영적인 구원을 의미했던 ‘화이트 호스’, 밥 딜런이 부당한 것들에 저항하며 기다렸던 선물이자 약속이었던 ‘화이트 호스’. 우리 문학에서 ‘임’이 다양한 함의를 가지고 등장하듯이 영어권에서 ‘화이트 호스’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어떤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고 기다려야 하는 구원의 상징처럼 쓰인다는 얘기다.

그런데 어쩌다 나는 ‘백마’ 하면 ‘백마 탄 왕자님’만 떠올리게 되었지. 우선은 백마를 타고 온 왕자가 등장하는 진부한 동화나 설화들 탓이겠지만, 신데렐라도 백설공주도 모두 ‘화이트 호스’라는 상징이 통용되는 문화권에서 온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애당초 여자 아이들에게 ‘화이트 호스’는 왕자와 세트로만 허용되어 왔기 때문이 아닐까. 동화에서 ‘백마를 탄 왕자’가 만들어낸 부당한 편견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백마를 통해 꿈꿀 수 있었던 많은 것을 왕자가 독점해 버린 것이 새삼스럽게 못마땅하다. 영적인 구원이라든가, 역사의 약속이라든가, 이상향 같은 것으로 채워 넣을 수도 있는 빈칸을 왕자가 미리 그득하게 차지해 버린 것 같다고나 할까. 그 구원이나 약속이 꼭 필요한가 아닌가는 또 별개의 문제이지만.

표제작 ‘화이트 호스’는 첫 장편에 대한 과한 호평이 부담스러워 집필을 핑계로 레지던스에 입주한 작가의 이야기이다.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백년도 더 된 낡은 집이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 ‘화이트 호스’를 인용하면서 소설은 끝났고 그것은 또 다른 반전이 된다. “나는 너의 화이트 호스가 필요 없단다.” 애초부터 여자 아이들에게 허용된 백마가 왕자와 세트였다면, 왕자를 거절하면 백마도 자동으로 거절된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영적 존재나 구원, 선물 같은 것을 기다리지 않고, 더러운 숲과 낡은 집을 무대 삼아 자기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화이트 호스’라는 상징에 기대어 여기에 없는 무언가를 기다리며 쓴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지금 여기의 불안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 작가 강화길이 쓴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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