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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오래 참은 여성의 말, 시어가 되다

등록 2020-09-11 05:00수정 2020-09-15 11:31

[책&생각]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세상의 아내

캐롤 앤 더피 지음, 김준환 옮김/봄날의책(2019)

일러스트 장선환
일러스트 장선환

빨간 모자는 제 손에 도끼를 들고 할머니를 집어삼킨 늑대를 ‘음낭에서 목구멍까지’ 한 번에 내리친다. 헤롯 왕비는 딸을 낳고 “어떤 남자든 내 딸이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못하게 하리라”고 맹세하며, “여기서 동쪽으로 가 모든 어머니의 아들을 다 죽여라”라고 명령한다. 손대는 것마다 황금으로 바꾸어버리는 마이다스의 부인은 남편을 숲 속 빈터의 이동식 주택에 데려다 놓고 말한다. ‘지금 나를 짜증 나게 하는 건 (남편 마이다스의) 멍청한 짓거리나 탐욕이 아니라 별로 나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순전한 이기심’이라고. <종의 기원>이 발표되기 7년 전, 다윈 부인은 동물원에 함께 간 다윈에게 말한다. “저기 있는 저 침팬지, 뭔가 자기를 생각나게 하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치운 것으로 유명한 파우스트의 부인은 남편의 비밀을 폭로한다. ‘영민하고, 약삭빠르고, 냉담하던 그 개자식에겐 애당초 팔 만한 영혼이 없었다는 것.’ 현실의 여성들을 지독히 혐오해 자신의 조각상을 사랑하게 된 피그말리온의 신부는 남편에게 ‘아이를 낳고 싶다 구걸’하고 ‘절정에 이르러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댐으로써 남편 피그말리온을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하늘을 날다 추락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이카로스의 부인은 ‘자신이 결혼한 남자가 전적으로, 철저하게, 절대적으로, 최상급 멍청이임을 그 스스로 세상에 입증하는 것을 작은 언덕 위에 올라서서 지켜본 처음 여자도 마지막 여자도 아니야’라고 일갈한다. 에우리디케는 자신을 데리러 지옥까지 찾아온 남편 오르페우스와 함께 지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뒤를 돌아보게 만들어 오르페우스와 헤어진다. 에우리디케가 남편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제발 나를 그냥 여기 있게 해줘.”

영국 최초의 여성 계관 시인 캐롤 앤 더피는 온 세계가 다 아는 남성 인물들-실존 인물과 신화 속 인물 모두-의 목소리에 가려져 그 존재조차 상상하기 어려웠던 여성 인물들의 목소리로 시집 한 권을 묶어냈다. 여성들의 음경 선망을 주장한 프로이트의 아내는 남편의 이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교훈을 담은 우화의 창조에 집착했던 이솝의 아내는 그런 남편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한 킹 콩 말고 작은 남자 애인을 사랑한 퀸 콩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매혹적인 집시 여인을 사랑한 ‘노트르담의 꼽추’ 콰지모도의 부인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시인은 거침없는 상상력과 기이한 발상으로 때론 유쾌하게 때론 신랄하게 오랫동안 가려졌던 여성들의 목소리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들의 목소리는 결코 나긋나긋하지 않다. 우아하지도 고결하지도 않다. 적나라한 욕설과 비속어, 외설적인 표현 등을 검열 없이 담아낸 이들의 목소리는 지독히 현실적이고 진실에 가깝다. 여성이라면 한 번쯤 입 밖에 내보았거나 혹은 내보고 싶어 했던 말들이 시어가 되고 활자가 되었다. 질주와도 같은 시인의 언어를 읽어내려가다 보면 우리 독자들의 상상력도 함께 자극당한다. 한국의 독자들이라면 어느새 ‘황조가’의 대상이었던 유리왕의 아내는 실제로 어떤 기분이었을지, 왕건의 열두 번째 아내는 행복했을지, 계백의 칼날을 받은 그의 부인은 어떤 최후의 한 마디를 남겼을지 궁금해질지도 모르겠다.

페미니스트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는 ‘시는 주어진 것에 대한 안주가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향한 질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남성의 목소리가 아닌 여성의 목소리였다면 어땠을까? 캐롤 앤 더피의 <세상의 아내>는 이런 리치의 시론을 향한 가장 그럴듯한 대답이다.

소설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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