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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다시 쓰기의 힘, 이야기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등록 2020-10-23 04:59수정 2020-10-23 09:41

신화 속 남성중심주의에 균열 내는 버나드 쇼 ‘피그말리온’
때로 낡은 부분 덜어내고 원작 부정해야만 고전은 부활한다
[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23) 리메이크를 넘어 리라이팅으로

원작보다 리메이크가 더 좋은 경우가 있을까. 놀랍게도, 우리의 짐작보다 꽤 많다. 예전에는 ‘어떻게 원작을 따라가나, 리메이크는 어디까지나 2차 창작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바뀌고, 새로운 해석은 더더욱 절실하다. 너무 낡아버린 어떤 부분을 과감하게 덜어내야만 비로소 우리에게 제대로 도착할 수 있는 고전들이 있다.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이 만든 완벽한 조각상만을 사랑했던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를 희곡으로 개작한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이야말로 대표적인 사례다. 신화 속에서는 너무도 남성중심주의적인 결말, 즉 ‘남성이 원하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신한 조각상의 목소리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조각상 갈라테이아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힘을 빌려 인간으로 변신하자마자 자신의 인생이 아닌 ‘한 남자의 소유물’로 전락해야 했다. 하지만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에서 우리 시대의 갈라테이아, 즉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 채 심각한 런던 하층민의 사투리를 쓰며 거리에서 꽃을 파는 여인 일라이자는 비로소 ‘목소리’를 얻는다. 자신만의 목소리를. 그것도 자신을 창조한 아버지의 착취를 뛰어넘어, 그리고 자신을 ‘제2의 인격’, 즉 놀라운 귀족 처녀로 변신시킨 제2의 아버지 히긴스의 시나리오를 뛰어넘어. 갈라테이아, 아니 일라이자는 원작을 강력하게 부정해야만 진정으로 눈부시게 부활할 수 있는 최초의 캐릭터였다.

1938년 개봉한 영화 &lt;피그말리온&gt;의 한 장면. 출처 야누스 필름
1938년 개봉한 영화 <피그말리온>의 한 장면. 출처 야누스 필름

신화 속엔 없는 여성의 ‘희망’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피그말리온은 ‘원톱’ 주인공이었다. 조각상과 사랑에 빠져 조각상에 입을 맞추고 조각상에 담요를 덮어주는 피그말리온의 기이한 행동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현실의 불완전한 여성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오직 조각상의 완벽한 미모에 빠진 피그말리온의 외모지상주의에 전혀 제동을 걸지 않았다. 오히려 조각상을 통해서라도 완벽한 이상형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려는 피그말리온에게 지극히 로맨틱한 사랑꾼의 이미지를 덧입혔다. 너의 간절한 소원이니, 내가 이루어주리라. 아프로디테는 조각상이라는 가상의 이미지와 사랑에 빠진 피그말리온의 욕망을 ‘사랑’으로 격상시켜주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여성의 꿈이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이 거의 없다. 여성들은 제우스와 아폴론을 비롯한 수많은 남성들에게 강간당하고, 스토킹 당하고,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심지어 다프네처럼 월계수로 변하기까지 하지만, 누구도 그녀들에게 ‘너만의 주체적인 인생을 살라’고 권하지 않는다. 올림포스 12신 중의 하나인 아테네 정도는 되어야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 권리’를 간신히 얻을 수 있었다. 인간세계에서는 프시케만이 유일하게 ‘인간이자 여성’으로서 꿈을 이루었는데, 그녀는 사랑의 신 에로스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지극히 예외적인 행운의 주인공이었기에 보통 사람들의 희망이 될 수는 없다.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은 바로 그 그리스 신화의 편협한 남성중심주의에 유쾌한 균열을 낸다. 보통 여인, 아니 보통보다 훨씬 비참한 상황에 있는 일라이자가 마침내 남성과 대등하게 ‘대사 분량’이 많은 ‘투톱’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일라이자는 런던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코번트 가든에서 꽃을 팔며 살아가는 일용직 노동자였다. 초라한 단벌 신세로 하루 종일 고생해서 꽃을 간신히 팔아도 주정뱅이 아버지가 그 돈을 뜯어가기 일쑤였다. 조각상일 때나 사람일 때나 일관되게 말이 없었던 그리스 신화 속의 갈라테이아와는 비교도 안 되게, 일라이자는 말이 많다. 일라이자는 ‘말이 많은 여자’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세상을 향해 온몸을 던지는 페미니즘의 다이너마이트다. 나는 그녀의 억척스러운 사투리가 좋다. 사투리든 속어든 상관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발화하는 일라이자가 눈부시다. 그런데 현대의 피그말리온, 이제 조각가가 아닌 언어학자로 변신한 히긴스는 그녀의 ‘말 많음’뿐 아니라 그녀의 ‘올바르지 않은 언어’를 혐오한다. 도저히 히긴스 자신의 완벽한 언어학 사전에 욱여넣을 수 없는 일라이자의 투박한 사투리를 ‘교정’하여 ‘꽃 파는 처녀 일라이자’를 완벽한 잉글랜드식 표준어를 구사하는 우아한 숙녀로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다. 신화 속의 피그말리온이 생명이 없는 조각상을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고 싶었다면, 현대의 피그말리온인 언어학자 히긴스는 ‘천민이자 사투리 구사자이자 볼품없는 아가씨’를 ‘완벽한 표준어를 구사하는 정형화된 숙녀’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과감한 리메이크에서 더욱 흥미로운 지점은 히긴스가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이 피그말리온보다 한층 심각하다는 점이다. 피그말리온은 남성중심주의에 찌들어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맨티시스트였다. 그는 사랑을 알았다. 사랑을 알았기에 대충 사랑할 수는 없었다. 완벽하게 사랑해야 했고, 사랑을 향해 인생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 앞에 납작 엎드려 기도하는 겸허함도 갖추고 있었다. 제발 내가 사랑하는 저 조각상이 진짜 살아 있는 여성이 되도록 도와주세요. 그 기도에 숨은 전제는 나는 오직 그 여자를 평생토록 사랑하겠다는 굳은 맹세였다. 아프로디테가 감동한 지점도 그곳이었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오직 사랑밖에 모르는 피그말리온은 조각상을 사람 못지않게 애지중지하는 지극정성을 보였던 것이다. 그는 사랑을 위해 미친 사람이 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는 사랑에 미쳤고, 사랑을 실현하는 예술에 미쳐 있었으므로, 분명 이기적이었지만 어딘가 매력적인 주인공이기도 했다. 하지만 히긴스는 다르다. 히긴스는 오직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일라이자를 이용한다. 일라이자를 향한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끼긴 하지만, 그 감정을 성공적으로 억누른다. 그에게는 언어학자로서의 성공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미션이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의 목표를 향해,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히긴스에게 일라이자는 살짝 매력을 느끼지만, 히긴스의 목표가 이루어지자 일라이자는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스스로 깨닫는다.

영화 &lt;피그말리온&gt; 포스터.
영화 <피그말리온> 포스터.

자기 안의 외계어를 지키는 일

일라이자는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일라이자의 원래 꿈은 런던의 깨끗한 꽃가게에서 어엿한 점원으로 일할 수 있을 정도의 ‘번듯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심각한 사투리로는 도저히 취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히긴스는 자신의 모든 언어학적 지식을 총동원하며 일라이자에게 완벽한 표준어를 가르쳤고, 지나치게 훌륭한 영어를 구사하는 그녀를 향해 파티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녀가 ‘헝가리 귀족’ 출신의 공주임이 분명하다고 떠들어댄다. 눈부신 숙녀로 변신한 일라이자를 향해 히긴스는 잠깐 흔들리지만 곧 평정을 되찾는다. 사랑에 빠지는 건 히긴스답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을 오직 귀찮은 잔소리 제조 기계 정도로만 바라보는 히긴스에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남성의 드높은 자존감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일라이자는 자신을 오직 실험실의 쥐처럼 대하는 히긴스의 냉혹함에 진저리친다. 차라리 꽃 파는 처녀일 때가 나았다고, 이제는 거리에서 꽃도 팔 수 없고, 평범한 꽃집에 취직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절규하는 일라이자는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지만 그것은 ‘진짜, 나 자신’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일라이자는 마침내 ‘자기만의 인생’을 찾았고, 더 이상 ‘피그말리온의 사랑스러운 조각상’이기를 그친다.

버나드 쇼의 새로운 <피그말리온>이 없었다면, 그리스 신화는 오랫동안 남성중심주의의 어두운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창조적이고 혁명적인 다시쓰기의 가치는 결코 퇴색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끊임없이 수정되고, 개작되고, 다시 쓰여야 한다. 이야기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처음 태어났던 그 이야기의 에너지가 약화될 때마다, 현대사회에서 더욱 절실한 문학의 가치가 부활할 수 있도록, 더욱 뜨거운 다시쓰기 열풍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나에게도 ‘일라이자의 사투리’가 있다. 이 세상의 언어로는 번역되지 않는, 나만의 울퉁불퉁하고, 도저히 통제가 안 되는, 내 안의 외계어가 있다. 문학을 사랑하는 일은 바로 이 ‘자기 안의 외계어’를 끝내 지키는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에 또 다른 혁명적인 작가들의 붓끝에서 일라이자보다 더 심한 사투리를 쓰는 멋진 갈라테이아가 다시 탄생하기를 꿈꾼다. 일라이자처럼 아무리 힘겨운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오롯한 세계를 창조해내는 주인공, 그러나 끝내 착한 청년 프레디와 결혼하는 일라이자와는 달리, 결혼이라는 결말을 거부한 채 ‘매일 새로운 시작’인 우리의 삶을 더욱 강인하고 당당하게 살아내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일라이자들이 탄생하기를. 원작을 살짝 변형시키는 소심한 리메이크를 넘어 새로운 원작을 아예 다시쓰기하는 리라이팅의 아름다움이 마음껏 꽃피는 세상이 오기를.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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