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게 범죄
트레버 노아 지음, 김준수 옮김/부키·1만6800원
출생에 관한 고해성사인가.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태어난 게 범죄>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미국의 시사 토크프로그램 <더 데일리 쇼> 진행자인 트레버 노아의 자전 에세이다. 그는 미국 정치 상황, 이민자 혐오, 인종 차별 등을 거침없이 풍자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작가로 변신한 그가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에게 태어나 겪어온 순탄치 않은 삶, 미국에서 유명 코미디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이 책에 진솔하게 담았다.
그가 태어난 1984년 남아공에는 유색인종 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남아 있었다. 유럽인과 원주민 간의 성관계는 법률로 금지됐고 위반시 5년 이하의 징역형이 내려졌다. 그래서 그는 백색증을 앓는 흑인인 척하며 살았다. 밖에 나갈 때는 가족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어머니,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걸어야 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1994년 공식 폐지됐다.
그는 어디서든 ‘아웃사이더’가 됐다. 흑인 그룹에도, 백인 그룹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물에 뜬 기름 같은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유머였다. 모르는 이들 무리에 넉살 좋게 끼어들어 농담을 몇 마디 날리면 그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어느 한 그룹에 소속되지 않더라도, 아이들을 웃기기만 하면 어느 그룹에든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곁에는 ‘인생 멘토’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어긴 죄로 수감되어 고초를 겪고, 재혼한 남편에게 가정 폭력을 당하는 등 매우 굴곡진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도 항상 밝고 강인한 모습을 보인 어머니의 인생 지론은 이랬다. “힘들어도 그 상황을 유머로 대하면 너무 암담하거나 너무 고통스러운 건 없다.”
책에는 어머니에 관한 일화가 많은데, 어머니가 죽음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긍정적 마음가짐으로 이겨낸 일도 그중 하나다. 재혼한 남편의 총에 맞아 병원에 실려 온 어머니는 그 순간에도 아들 노아에게 “내 아가, 넌 좋은 면을 볼 줄 알아야 해”라고 조언한다. 도대체 어떤 좋은 면을 보라는 걸까. 얼굴을 다쳐 피범벅이 된 어머니는 예상치 못한 유머를 날린다. “이제는 네가 공식적으로 가족 중에서 제일 잘생긴 사람이 되었잖니.” 이처럼 책에 담긴 가족사는 어둡고 아프지만 시종일관 발랄하고 유쾌하다. 지은이가 비극적 삶 속에서도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일 테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