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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찌질한 정치

등록 2020-10-30 05:00수정 2020-10-30 10:06

[책&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1792년 4월16일 사간원 정언 유성한(柳星漢)은 짧은 상소를 올린다. 정조가 최근 경연(經筵)에 드물게 나간다면서 자주 나가서 공부에 전념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저 그런 상소였건만 문제 삼는 자들이 있었다. ‘목이 메인다는 이유로 밥을 먹지 않을 수는 없다’는 표현과 ‘광대가 어가(御駕) 앞에 함부로 접근하고 기생이 깊은 궁궐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혹 사실이냐’는 물음이 문제가 되었다. 특별히 전자가 문제가 되었다.

당시 이 구절은 경연 참석이 사도세자를 떠올리게 하므로 정조가 경연에 나가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니 상소는 아버지가 생각난다 해서 경연을 빼먹지 말고 열심히 참석해 공부하라는 뜻이 된다. 신하로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정조 역시 비답에서 완곡하게 그 해석에 동의하고, 상소 전반에 대해서는 진심에서 나온, 근래에 보기 드문 진솔한 상소라고 평가하였다.

열흘 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장령 유숙이 상소를 올려 유성한을 삭탈관직하고 내쫓으라고 요청했다. 솔직히 말하지 않고 돌려서 은근히 말한 것은 왕을 정직하게 섬기는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은근히 돌려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었던가. 유숙의 상소는 말꼬리를 잡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를 키우고 싶지 않았던 정조는 유성한을 처벌하지 않았다.

유숙의 상소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어 사간원과 사헌부의 상소가 날아들었고 좌의정 채제공 역시 상소를 올려 유성한을 비난했다. 정조가 신임했던 좌의정이 나섰으니 그다음은 불문가지였다.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 100명이 뒤를 이었고, 승정원이, 형조판서가, 우의정이 거들었다. 사헌부와 사간원도 유성한을 처벌하라고 거듭 상소를 올렸다. 윤4월17일에는 경상도 유학 1만57명이 연명 상소를 올렸다. 이쯤 되고 보니, 유성한은 왕인 정조에게 신하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모욕적인 말을 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실제 있지 않았던 ‘모욕’은 상소가 이어지자 어느새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의 복잡하기 짝이 없는 사건의 진행 과정은 굳이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유성한 상소에 대한 시비가 몇 달 동안 온 조정을 덮어버렸다는 것이다. 왕과 조정은 토지와 세금, 군정(軍政), 구휼(救恤), 형정(刑政), 교육, 인사 등등 날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평범한 상소문의 한 구절을 따서 세상이 두 쪽이라도 난 것처럼 옳네, 그르네, 쫓아내라, 죽여라를 반복하는 몇 달 동안 정작 해야 할 나랏일이 까맣게 잊혔던 것이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찌질한 정치는 지금도 계속된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을 가지고, 사건이라 말하기도 창피한 사소한 사건을 가지고 대한민국 최고의 학부를 나온, 그 어렵다는 시험을 통과한 분들이 정계에서, 국회에서 언성을 높이고 얼굴을 붉히며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한다. 국민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복리(福利)에 대한 숙고와 토론은 사라지고 없다. 찌질한 정치를 하는 이유는 짐작이 간다. 하지만 그래도 제발 품위 좀 찾으시라!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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