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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그럴 줄 알았다는 어른’보다 ‘몰두해서 노는 아이’가 나아요

등록 2020-11-07 09:39수정 2020-11-07 11:46

[토요판] 그림책 작가들의 ‘돌파하는 힘’
(3) 이수지

“순간에 온 마음으로 머무는 힘
지금 마주한 순간에 100% 머문다”

세계적 명성 가져다준 ‘경계 3부작’
글 없이 혼자 노는 아이 나오는 책
놀이 몰입 찰나 감정 오롯이 담겨
현재를 즐기다가 다른 세계 ‘접속’
궁리하고 모색하며 스스로 길을 찾는 놀이가 곧 삶의 태도가 된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을 보고 나면 생기가 차오른다. “새로운 작업을 구상할 때는 늘 노는 기분을 느낍니다. ‘이렇게 하면 재밌겠다!’는 충동이 부싯돌이 되어서 저를 불타오르게 해요.” 해란 작가
궁리하고 모색하며 스스로 길을 찾는 놀이가 곧 삶의 태도가 된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을 보고 나면 생기가 차오른다. “새로운 작업을 구상할 때는 늘 노는 기분을 느낍니다. ‘이렇게 하면 재밌겠다!’는 충동이 부싯돌이 되어서 저를 불타오르게 해요.” 해란 작가

돌파가 필요한 순간은 언제일까? ‘이렇게 되면 좋겠다’는 희망, 목표, 구상이 있고 그리로 가려는데 가로막는 변수가 나타날 때다. 목적지가 없을 때는 난관도 없다. 다시 말해 돌파가 필요하다는 건 무언가를 바라고 희망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생의 난관은 ‘바라는 마음’을 가진 한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난관을 만나면 나름의 궁리를 한다. 빙 둘러가거나 전속력으로 달음박질하거나 때로는 웅크려 앉아 기다린다. 문제에 맞춰 임기응변하며 해결책을 찾는다. 그렇게 암중모색하다 작은 구멍 사이로 가능성을 발견할 때 기쁨이 찾아든다. ‘아,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하는 발견은 언제나 빛을 불러들인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느낌, 시야가 밝아지는 느낌, 더 넓은 세계에 접속하는 느낌을 동반한다.

돌파의 프로세스를 요약하면 ‘원하는 결말을 방해하는 장애물 앞에서 탐색하고 시도하여 해결책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놀이와 배움, 나아가 창작의 프로세스와 같다. 놀이하는 아이(연구하고 만드는 사람)는 제약 조건 안에서 임기응변을 발휘하며 놀이(탐구와 창작)를 이어가기 위해 모색한다. 자발적 궁리를 통해 새로운 지혜를 얻는다. 충분히 숙달된 후엔 난도가 높은 놀잇감(새로운 과제)을 찾아 떠난다.

이수지는 놀이가 품은 창조적 힘을 통찰한 작가다. 한국 최초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최종후보에 오르기도 한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경계 3부작’―<거울 속으로> <파도야 놀자> <그림자 놀이>―은 동일한 판형에 책이 열리는 방향만 다른 글 없는 그림책이다. 세 작품 모두 혼자 노는 아이가 등장하고, 놀이에 몰입한 찰나의 감정이 펄떡펄떡 살아 숨쉰다. 또 다른 글 없는 그림책 <선>에서 아이는 빙판 위에서 연거푸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스케이팅을 ‘즐긴다’. <이렇게 멋진 날>의 아이들은 폭우가 쏟아지는 우중충한 날을 최고로 즐거운 날로 탈바꿈시키는 마법 같은 힘을 보여준다.

궁리하고 모색하며 스스로 길을 찾는 놀이가 곧 삶의 태도가 된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을 보고 나면 생기가 차오른다. 어릴 적 밖에서 실컷 놀고 복숭앗빛 뺨으로 귀가하던 길에 느꼈던 후련함, 내일이라는 미지의 시간을 낙관하고 기대하던 마음을 회복하게 한다.

이수지 작가가 작업을 하는 모습. 감탄하려고 작정한 사람은 닳고 닳은 대상에서도 기어코 신선한 무언가를 찾아낸다. 해란 작가
이수지 작가가 작업을 하는 모습. 감탄하려고 작정한 사람은 닳고 닳은 대상에서도 기어코 신선한 무언가를 찾아낸다. 해란 작가

순간에 머물 줄 아는 ‘노는 어른’

―얼마 전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에서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셨어요. ‘그림의 힘으로 이끄는 이야기를 책이라는 그릇에 담고 독자와 같이 노는 사람.’ 자신을 노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어른은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새로운 작업을 구상할 때는 늘 노는 기분을 느낍니다. ‘이렇게 하면 재밌겠다!’는 충동이 부싯돌이 되어서 저를 불타오르게 해요. 첫 마음이 휘발되기 전에 종이에 얹어 놓으려고 빠르게 작업하는 편이고, 오래 매만지거나 반복하는 작업에는 취약합니다. 딱 책에 쓸 만큼만 그리지요. 시대와 상관없이 사랑받는 고전 그림책들은 ‘작가가 진짜 신나게 작업했구나’ 하는 느낌이 전해져요. 그런 생생한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하려면 먼저 제가 생생하게 몰입해야 하고, 그 정수를 잘 옮겨낼 수 있는 형식을 찾아내야 해요. 물론 모든 작업 과정이 놀이일 순 없어요. 출판계 시스템 안에서 일정한 결과물을 내려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어려운 문제도 만나요. 하지만 문제를 풀기 위해 그 안으로 쏙 들어가 집중하는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거겠죠.”

―‘경계 3부작’은 ‘놀이 3부작’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소위 말하는 장난감이 등장하지 않아요. 거울, 그림자, 파도처럼 일상 속 배경이 놀잇감이 되지요.

“놀이의 중요한 본질은 자발적이고 목적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육방송(EBS) 다큐멘터리 <놀이의 반란>에 나온 실험이 있어요. 아이들을 세 집단으로 나누어서 첫번째 그룹은 스스로 놀잇감을 고르게 했고, 두번째 그룹은 어른이 ‘이걸로 놀아보면 어때?’라며 약한 권유를 했고, 세번째 그룹은 아예 놀잇감을 지정해주었습니다. 놀이 시간이 끝나고도 계속 남아서 놀이를 이어간 그룹은 첫번째가 유일했어요. 나머지 두 그룹은 놀이 시간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떠났지요. 아주 약한 권유나 개입만으로도 아이의 놀이를 망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자발적으로 몰입하기에는 기획된 완제품이 아닌 날것의 재료가 유리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연은 최고의 장난감이에요. 모든 게 가능태로 있으니까요. 가능태에서 완제품을 보는 힘, 스스로 ‘이거 이거 더하면 이렇게 되겠네’라면서 상을 그리는 힘이 놀이하는 아이가 가진 창조성이지요. 아이들은 놀다가 생각대로 안 되면 유연하게 방향을 틀기도 해요. 원대한 계획이나 목표 의식을 갖기보다는 순간순간 반응하면서 오직 현재에 충실하지요. 작가로서 저는 그런 ‘어린이성’과 놀이의 속성을 책에 담고 싶어요.”

―가수 루시드 폴과 함께 만든 <물이 되는 꿈>에서 수중재활운동을 하는 아이의 몽상을 5m가 넘는 기다란 병풍책으로 펼쳐놓았고, <검은 새>에서는 화가 난 아이가 감정을 식히는 시간을 장대한 여행기로 펼쳐놓으셨어요. <동물원>에서는 인파에 밀려 부모님과 잠깐 떨어진 아이의 시간을 오색찬란한 사교의 시간으로 묘사하셨죠. 무언가에 열중한 아이 입장에서 나머지 세계가 일시정지한 것처럼, 순간과 아이와 감정만 존재하는 것처럼 그려진 작품이 많아요.

“남편이 저를 하루살이 인생이라고 불러요.(웃음) 계획을 거의 세우지 않고 재미있겠다는 느낌을 좇아서 현재만 살기 때문이지요. 저는 늘 현재에 관심이 많고,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요. 어차피 미래를 걱정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고,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면 결국 오늘의 내가 뭔가를 해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오늘 마주한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데에 에너지를 쓰는 게 낫죠. 저에겐 원대한 계획 대신 순간의 절실함이 있어요. 순간에 온 마음으로 머물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방향성이 생겨 있을 거라 기대해요. 보통은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려고 촘촘한 계획을 세우는데, 그런다고 마음이 편해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구멍이 있는 모습 그대로 부딪히면 다른 사람들이 와서 채워주기도 해요. 우연에 기대면서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 더 마음 편해요.”

―‘순간에 온 마음으로 머문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네요.

“소설가 다니엘 페나크의 <학교의 슬픔>이라는 책이 있어요. 학창 시절 열등생이었던 자신의 경험담과 중요한 선생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인데요. 좋은 선생님들은 무엇이 달랐는지 이런 문장으로 설명해요. ‘그들은 수업할 때 거기에 있었다.’ 몸만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까지 전부 한곳에 있기가 생각보다 어려워요. 이 일을 하면서 저 생각 하거나, 아이의 질문에 입으로는 대답하지만 정신으로는 다른 곳에 가 있는 식이죠. 저도 작가, 강연자, 사장, 엄마, 딸로 하루에도 몇번씩 역할 변경을 하지만, 어느 때든 지금 마주한 순간에 100%로 머문다는 원칙을 잊지 않으려 노력해요.”

감탄하려고 작정한 일상여행자

이수지 작가의 그림. 해란 작가 해란 작가
이수지 작가의 그림. 해란 작가 해란 작가

―작가님은 ‘재밌겠다!’는 충동과 끌림이 정말 중요한 분인데요. 경험이 많아지면 무덤덤해질 법도 한데 중견작가가 된 지금도 재밌는 일이 너무 많아 고민이라는 점이 신기해요.

“학교에서 아이들과 수업할 때 ‘그릴 게 없어요’, ‘쓸 말이 없어요’라는 친구를 만나면 속이 터져요.(웃음) 저는 휴대폰 충전기 줄만 가지고도 3시간은 떠들 수 있는데요. 이거 봐봐. 생긴 게 뭐랑 비슷하니? 재질은 어떤 느낌이야? 꼬인 모양이 이렇게 바뀌는 상상을 해봐. 그렇게 하면 뭐가 연상돼? 이렇게 질문을 이어가면서 작은 재료를 크게 키워가요. 그러려면 시간을 들여서 자세히 보아야 하고, 스스로 이야기를 찾아가면서 점점 살을 붙여야 해요. 창작 과정이 다 그런 식이에요! 자세히 들여다볼 정도로 애정을 쏟을 대상을 찾는 일이 중요해지는데요. 재미있는 거리, 감탄할 거리는 현실에서 멀리 떠나야 찾을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에요. 늘 옆에 있었는데 못 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감탄하는 태도가 필요해요. ‘다 그런 거지. 원래 그런 거야. 당연한 거야. 나는 다 알고 있었어’라는 말을 하지 않는 태도, 내가 놓친 좋은 것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이지요. 감탄하는 법을 알면 세상을 놀이터로 만들 수 있어요.”

―감탄하는 법을 다시 배우고 싶은 독자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재미있는 일이 통 없다면 ‘이 정도가 재미지’라는 기준이 높기 때문 아닐까요? 대충 재미있거나 조금만 재미있어도 재미있는 건데요. 저는 다른 작가의 그림책을 보다가 이건 참 좋네 싶은 점이 하나 있으면 그 책을 구입해요. 그림체가 별로이거나 서사에 구멍이 있어도 하나 좋으면 그냥 좋은 거예요. 어디에서든 좋은 점, 멋있는 점, 배울 점을 찾으려는 태도를 가지면 매 순간 새로운 감동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오늘은 또 어떤 놀라움과 만날까?’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세계를 향해 문을 살짝 열어두는 거지요.”

―반면 입버릇처럼 “뭘 이렇게 유난이야. 별것도 아닌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요.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를 경직시키고 축소시키는 말이지요. 그렇게 스스로를 닫는 언사를 구사하는 사람을 만나면 안됐어요. 저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당신은 더 이상 무엇으로부터도 얻어 갈 게 없겠군요라고 생각하지요.”

인터뷰를 마치고 ‘작정한 사람’이라는 표현 하나가 마음에 남았다. 감탄하려고 작정한 사람은 닳고 닳은 대상에서도 기어코 신선한 무언가를 찾아낸다. 그건 마치 여행자가 되는 일과 같다. 여행자는 새로운 장소에 도착한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발견하고 감동할 마음의 준비를 한 사람이다. 감각을 최대한 열고 좋은 것을 즐기겠다는 각오로 마음의 스위치를 켜두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지리멸렬한 일상의 풍경도 여행자의 눈에는 경이롭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해보아야 한다. 갑갑한 현실, 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 난관과 장애물…. 그 안에는 정말 유익이 하나도 없는가? 감탄하려고 작정한 사람에게 감탄이 찾아오는 법이라면, 무엇이든 구하는 자가 찾는 법이라면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 무엇에서든 누구에게든 좋은 점을 찾기로 작정한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에서부터.

이수지 작품 목록

2004년 <동물원>, 비룡소

2005년 <우리는 벌거숭이 화가>, 길벗어린이

2006년 <움직이는 ㄱㄴㄷ>, 길벗어린이

2007년 <검은 새>, 길벗어린이

2008년 <나의 명원화실>, 비룡소

2009년 <파도야 놀자>, 비룡소

2009년 <거울 속으로>, 비룡소

2010년 <그림자 놀이>, 비룡소

2013년 <토끼들의 밤>, 책읽는곰

2015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비룡소

2017년 <선>, 비룡소

2018년 <강이>, 비룡소

대표작

<파도야 놀자>

이수지

한국과 영국에서 회화와 북아트를 공부했다. 종이책의 물성과 행위유도성을 깊이 관찰한 글 없는 그림책 <거울 속으로> <그림자 놀이> <선> 등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평단과 독자를 모두 사로잡았다. 목탄, 연필, 파스텔, 수채물감, 콜라주 등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 아이가 몰두한 ‘작은 환상’의 순간을 간결하지만 농밀하게 그려낸다. 가수 루시드 폴, 중국 청소년문학가 차오원쉬엔, 미국 아동문학가 버나드 와버 등과 책 작업을 하기도 했다.

최혜진. 사람을 인터뷰하는 에디터이자 미술과 문답한 과정을 글로 쓰는 작가.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 <우리 각자의 미술관>,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등을 썼다. 삶에 위로를 받고 싶을 때면 늘 그림책이 곁에 있던 것을 생각하며,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과 ‘세상을 돌파하는 힘’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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