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부 이분법 넘어 ‘소유’라는 관념 자체 다룬 ‘소유의 문법’
탐욕에 길들여지지 않고 나만의 길 찾으려는 이들에게 권하고파
탐욕에 길들여지지 않고 나만의 길 찾으려는 이들에게 권하고파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했던 월든 호숫가 오두막의 내부. 이승원 제공

월든 호숫가에 지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오두막. 현재는 복제품으로 남아 있다. 이승원 제공
비명 같은 ‘동아’의 고함소리 최윤의 단편소설 ‘소유의 문법’은 바로 우리 현대인의 탐욕을 적나라하게, 그러면서도 우아하고 현명하게 통찰한다. 이 작품은 가난이나 부와 싸우는 차원을 뛰어넘어, ‘소유’라는 관념 자체와 싸우고 있다. 마음이 아픈 아이 동아의 아빠인 ‘나’는 자꾸만 아무 데서나 고함을 지르며 괴로워하는 아이의 증세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자폐와 발달장애를 겪고 있는 딸을 돌보느라 엄마 아빠 모두 커리어를 거의 포기한 상태지만, 두 사람은 딸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불평 한마디 없이 힘겨운 시간을 견디며 동아를 애지중지 키운다. 그러던 중 학창 시절의 스승 P로부터 좋은 제안을 받게 된다. 미국에 살고 있는 유명 조각가 P는 ‘나’에게 자신이 소유한 두 채의 전원주택 중 하나가 남았으니, 그 집에 들어가서 살면서 집을 보살펴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빈집을 관리해주는 것으로 임대료를 대신할 수 있게 된 ‘나’는 딸 동아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산골로 이사 갈 수 있게 된 것을 엄청난 축복으로 여긴다. 아름다운 산골마을에서 평화롭게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된 ‘나’는 딸 동아의 증상이 호전되는 것을 느끼며 더욱 기뻐한다. 딸의 증상이 점점 완화되는 동안 아내는 화가의 꿈을 다시 키우고, ‘나’는 목공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된다. 아름다운 S계곡으로 이사를 가기 전, 동아네 가족은 붕괴 직전에 있었다. “동아는 무언가를 다 아는 듯,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소리지르듯 정성을 다해 온몸으로 고함을 치는데, 때로 그 시간이 몇 분씩 지속되어 아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을 우리는 가장 두려워했다.” 부모는 딸이 저토록 소리를 지르다가 혼절해버릴까 봐 두렵기도 하지만,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도대체 딸이 왜,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그토록 절규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동아의 고함 소리 때문에 아파트 경비실로 민원이 들어오는 일이 잦아지자, 그들은 전셋집을 내놓고 산골의 우사를 개조하여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정도였다. 이런 가족에게 아름다운 전원주택과 산골마을의 완벽한 풍광까지 선물한 P는 ‘감사’라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선물을 그들에게 준 것이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감사할 것투성이다. 이 마을의 유일한 흠이라고 알려진 커다란 계곡물 소리도, 동아의 고함소리를 약화시켜주는 고마운 방음장치가 되어준다. 워낙 외진 곳에 있어 가게 한번 다녀오기가 힘들어 보이지만 한밤중에도 갑자기 고함을 지르는 동아의 증상 때문에 그 또한 한없이 고마운 주변환경이 된다. 동아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도 그 누구에게도 미안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부부는 고함치며 절규하는 딸의 심각한 증상까지 사랑으로 보듬으려 노력한다. “동아가 고함칠 때 말을 걸면 동아는 한 손을 높은 곳을 향해 들고 크게 크게 원을 그린다. 그것도 여러 번. 아내는 한번 동아의 그 모습을 스케치해 ‘우주를 향해 외치는 소녀’라는 제목을 붙여주었다.” 우주를 향해 외치는 소녀의 속내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지만, 동아는 열 살이 넘어서도 제대로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마을 공동체에서 커다란 사건이 터진다. 어느 날 이 시골마을 주민들은 다짜고짜 ‘나’로 하여금 한 탄원서에 서명을 하라고 부추긴다. 마을 사람들의 편의를 봐주며 친분을 쌓아온 ‘대니얼 장’에게 P의 주택 소유권을 이전하라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이해관계에 얽힌 주민들은 ‘대니얼 장’의 편을 들지만, ‘나’는 엄연히 소유권을 가진 은사 P가 이런 곤경에 처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곳에 살지 않고 집을 소유만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근거 없이 P를 험담하는 마을 주민들은 ‘나’에게 서명을 하라고 압박을 하지만, ‘나’는 동네에서 따돌림을 받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옳지 않은 일에는 발을 들이지 않는다. 이 모든 것과 상관없는 자리에서 홀로 우주와 소통하듯 즐겁게 지내는 딸은 가끔 ‘비명’을 통해 이 견딜 수 없는 불합리를 저 먼 곳을 향해 고발하는 듯하다. 동아의 절실한 외침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독자의 가슴을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저릿하게 만든다. “저 애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저 애는 누구에게 저렇게 전언을 보내나. 동아의 절실한 전언은 수신자에게 닿기는 하는 걸까.” _______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사랑 ‘나’는 딸의 비명을 이해할 수 없지만, 산골마을에서의 조용한 삶이 딸의 아픔을 치유하고 있음을 독자는 느낄 수 있다. “동아가 숲속이나 산책길에서 그날 주운 물건에 집중하는 시간 나는 나무들을 유심히 살핀다.”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저 자연의 사물들에 조용히 집중하는 딸의 행동이야말로 그 무엇도 소유하지 않은 채로 행복을 느끼는 낙원 같은 삶이 아니었을까. 집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주인을 몰아내기 위한 기이한 협잡을 벌이는 동네 주민들에게 물난리와 산사태가 덮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지만, 그 여름 ‘소유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을 하며 서로 싸우던 어른들의 떠들썩함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목수로 독립을 하고, 딸은 비로소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된다. 모두가 ‘소유권’에 집착하며 집주인을 내쫓는 공작을 벌이는 동안, ‘자연’이라는 그 누구의 소유권도 주장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조용히 경외감을 느끼며 살아가던 ‘나’와 딸은 그 여름 훌쩍 성장하고 치유되어 더 나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어떤 소유의 문법에도 물들지 않고 자신만의 올바른 길을 찾으려고 애쓰는 ‘나’, 그리고 소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아픈 딸 동아가 오히려 가장 아름답게 ‘소유의 문법’을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유와 탐욕의 시스템에 길들어 ‘이 세상에 올바른 모습으로 거하는 법’을 잊어가는 현대인에게 ‘소유의 문법’을 뛰어넘는 뜨거운 생의 진실을 깨우치는 수작이다. 소유의 집착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길’을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작품이 다 끝나고 나서도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는 잔상은 바로 동아의 고함치는 모습이었다. 이 소녀는 그 누구에게 그토록 간절하게, 그토록 절박하게 자신의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바라만 봐도 행복해지는 월든 호수의 풍경. 이승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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