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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성착취 ‘하비 와인스틴’들이 설치는 자유의 세계?

등록 2020-11-20 04:59수정 2020-11-20 10:44

슈거 대디 자본주의
피터 플레밍 지음, 김승진 옮김/쌤앤파커스·1만6000원

“내 인생 전체가 더 좋은 쪽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고” 갔다. 그러나 목욕 가운 차림의 “그와 단둘만 남게 됐을 때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공포심에 짓눌려 거의 마비된 상황”에서조차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을 화나지 않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나에게 성수를 내릴 수도 있고 나를 파괴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거물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에게 면접 받으러 간 젊은 여성이 겪은 ‘비즈니스 미팅’에 대한 묘사다.  

하비 와인스틴이 프랑스 칸에서 열린 70회 칸영화제의 드 그리소고노 파티에 참석했다. 칸/AFP 연합뉴스
하비 와인스틴이 프랑스 칸에서 열린 70회 칸영화제의 드 그리소고노 파티에 참석했다. 칸/AFP 연합뉴스

<슈거 대디 자본주의>가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오늘날 경제 시스템을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여서다. 젊은 여성에겐 ‘선택의 자유’가 있었지만, 공포를 느끼고 고민에 빠진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고용 조건이나 임금 등 당사자들이 결정할 ‘사적 문제’는 늘어나고, 이런 세계에서 회색 지대를 악용하는 하비 와인스틴‘들’이 나타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제약에서 벗어난 자본주의’가 더 공정한 사회로 이어지리라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의 믿음은 실패했다는 것이 저자 피터 플레밍 영국 런던대 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슈거대디닷컴’이라는 데이트 주선 앱을 통해 벌어지는 ‘슈거 대디’(부유한 중년 남성)의 ‘슈거 베이비’(가난한 젊은 여성) 착취에서 오늘날 자본주의 모습을 목격하고, 이를 ‘슈거 대디 자본주의’라 명명했다.

슈거 대디-베이비의 계약은, 임대사업자의 주거취약층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에서 나아가 ‘방세 대신 섹스’라는 착취의 극단적 사례와 무관하지 않다. ‘제로 아워 계약’(노동시간이 명시되지 않은 근로계약), ‘긱 이코노미’의 등장, 온 디맨드 형태의 시간제 일자리, 프리랜서 노동의 확산과 개인화 등 구체적 사례는 세계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인간 충격 흡수제’라는 표현은,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택배노동자들의 잇단 죽음(과로사든 자살이든)이 ‘지속 불가능한 패러다임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착취’라는 점에서 충격적이지만 적확하다.

피터 플레밍은 ‘슈거 대디 자본주의’를 ‘탈공식화’(deformalization)의 문제로 본다. 경제적 자유의 확대라는 미명 하에 “공적 거버넌스와 규제를 통한 노동자 보호가 일터에서 사라진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의 ‘결론’에서 탈공식화의 경향을 꺾을 아이디어 4가지를 제안한다. (가령 보편기본소득 같은 것을 통해서) 경제적 빈곤을 없애야 하며, 직원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을 형식상 독립 계약자로 취급하는 근로계약을 입법을 통해 금지해야 하고, 노동 기준과 소비자 안전 등을 감독하는 공공영역을 되살려야 하며, 임금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동자위원회의 경영 참여와 노동시간 축소(주3일 근무제)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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