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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때로는 주연보다 조연이 아름답다

등록 2020-12-04 04:59수정 2020-12-04 10:13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야기의 메신저’였던 <힐빌리의 노래> ‘보니’
내 안의 그림자와 빛 알아봐주는 사람 향한 사랑을 일깨우는 문학
[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25)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것

실화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lt;힐빌리의 노래&gt;에서 밴스의 엄마 베브 역을 맡은 에이미 애덤스(오른쪽)와 밴스의 할머니 보니 역을 맡은 글렌 클로스. 넷플릭스 제공
실화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힐빌리의 노래>에서 밴스의 엄마 베브 역을 맡은 에이미 애덤스(오른쪽)와 밴스의 할머니 보니 역을 맡은 글렌 클로스. 넷플릭스 제공

잿더미에서 찬란하게 일어나는 영웅이 보여주는 불굴의 삶 이야기는 언제나 매력적이다. 하지만 평생 영웅 따위는 될 수 없는 존재들, 영원히 최고의 스포트라이트 같은 것은 받을 수 없는 ‘주변부로 밀려난 조연들’이 때로는 더 복잡하고 처절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예컨대 작가 J. D. 밴스의 자전적 이야기 <힐빌리의 노래>를 읽으며 나는 이 작품의 영웅적인 주인공 밴스보다 그의 그림자처럼 살아온 두 여인, 할머니와 엄마의 삶에 더욱 이끌렸다. 심각한 알코올중독 상태인 아버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유일한 영웅처럼 사랑했던 엄마 베브. 그리고 약물중독으로 망가져버린 딸 베브를 제치고 손주 밴스의 보호자가 되기를 자청한 할머니 보니의 선택이 가슴을 울렸다.

밴스는 평생 따스한 가족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남자친구가 너무 자주 바뀌는 엄마의 불안한 삶은 밴스로 하여금 끝없는 결핍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도 대대로 운명처럼 내려오는 끔찍한 가난은 총명하고 꿈 많은 밴스를 좌절시킨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시작하려 할 때마다, 엄마는 습관처럼 마약에 손을 대고,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걸핏하면 일자리를 잃어버린다. 약물중독에 빠진 엄마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 밴스 또한 공부를 포기하고 말썽꾸러기 친구들과 어울리려는 찰나, 폐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을 오가던 할머니 보니가 밴스의 삶에 끼어든다. 알코올중독 남편의 죽음에 이어 약물중독으로 딸까지 잃을 위험에 처한 보니는 자신 또한 병마와 싸우면서도 사력을 다해 손자 밴스를 구함으로써 이 가족의 마지막 희망을 찾으려 한다.

보니는 ‘나는 역시 안 될 거야’라는 절망에 빠진 손주를 제대로 키워내기 위해 누군가의 엄청난 인내와 희생이 필요함을 온몸으로 이해한다. 보니를 통해 나는 아프게 깨달았다. 절망에 빠진 한 아이를 제대로 된 어른으로 만들기 위해 때로는 누군가의 평생을 걸어야 한다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보니는 자신의 무너져가는 생명줄을 부여잡고 손주를 지키는 데 사력을 다한다. 딸 베브의 간호사 면허가 정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손주에게 오줌 샘플을 대신 받아 주기를 부탁해야 하는 할머니의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까. 이 이야기의 영웅 밴스의 고통에는 성공과 환호라는 보상이 있지만, 삶의 그늘진 자리에서 평생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할머니 보니에게는 그 어떤 보상도 없기에 더욱 그녀의 투쟁이 눈부시다. 아무런 보상도 없고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는 고통, 오직 끝없는 아픔의 행렬밖에는 보이지 않는 할머니의 희생 뒤에는 손주에 대한 사랑과 우리 가족 중 단 한 명이라도 눈부신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는 마지막 염원이 담겨 있었다.

신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나요?

이 고집스러운 괴짜 할머니 보니의 진짜 매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따스한 마음이다. 당시 무려 180달러라는 고가에 판매되는 그래핑 계산기가 없어 수학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던 손자를 위해 할머니는 끼니를 굶어가며 쌈짓돈을 털어 계산기를 사준다. “셀비 선생님이 내준 숙제는 다 마쳤니?” “아직요.” “그럼 어서 시작해, 이놈아! 네놈이 그거 가지고 온종일 빈둥대라고 내가 쌈짓돈 탈탈 털어서 손바닥만 한 컴퓨터를 사준 줄 알아?”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약물중독에 빠진 엄마의 우울한 모습을 피해 온몸으로 안식처가 되어준 할머니 보니 덕분에 밴스는 마침내 예일대학 로스쿨에 입학할 정도의 수재로 자라난다. 할머니 집에 들어가자마자 밴스의 성적이 올랐고, 외로운 소년 밴스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안정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힐빌리’는 미국의 쇠락한 공업지대인 러스트벨트 지역에 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백인 하층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아픔을 고백하는 말을 하고 싶어도 마이크가 없는 사람들, 한 번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본 적 없는 사람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성공 스토리보다도 그 할머니의 부서진 마음이 더욱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푸드스탬프(미국의 빈곤계층에게 공급하는 음식배달 서비스)에서 배달을 나온 젊은이에게 음식을 조금 더 달라고 구걸할 수밖에 없는 할머니. 자신은 간신히 살아남을 만큼 아주 조금만 먹고 손자에게는 많은 것을 나눠주는 할머니. 자신이 중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정신상태가 불안정한 딸에게서 손주를 데려와 기어이 공부를 시키는 할머니.

어쩌면 모두가 부러워하는 성공을 이루는 것보다 6년이나 약물중독을 끊은 엄마 베브의 투쟁이 더 힘겹고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할머니 보니는 끝내 손주가 성공하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자칫 문제아의 전형적인 루트를 밟을 뻔했던 밴스는 할머니의 보험료를 대신 내주며 뿌듯한 기쁨을 느끼는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한다. 한 번도 주목받는 생을 살지 못했지만, 문학작품을 통해 눈부신 ‘이야기의 메신저’가 되는 사람들. 누구도 백인 하층민 ‘힐빌리’의 노래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지만, 마침내 손주의 글쓰기를 통해 찬란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보니의 삶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누나와 함께 연예인이 되겠다며 철없이 뉴욕으로 가겠다고 설치던 밴스가 엄마에게 정신없이 구타를 당한 날, 주방과 거실을 나누는 좁은 통로에 서 있던 밴스는 너무도 슬픈 표정으로 할머니에게 질문을 한다. 할머니를 ‘할모’라 부르며 어리광을 피우던 밴스는 이런 질문으로 보니를 당황스럽게 한다. “할모, 신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나요?” 할머니는 고개를 떨구고 손주를 껴안더니 꺽꺽 울기 시작한다. 신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간신히 지옥 같은 삶을 버티고 있던 할머니에게, 손주의 질문은 너무도 아프게 고통의 뿌리를 건드린 것이다. 신이 오직 우리에게만 사랑을 주지 않는 것 같을 때, 그 누구도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을 주지 않는 것 같을 때, 할머니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 사랑을 그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손주에게, 할머니는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을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주며 남은 시간 모두를 손주를 위해 불태운다.

우리가 영원히 사랑해야 하는 사람

문학은 또한 질문하는 것이다. 아무도 차마 공개적으로 질문하지 못하는 것들을. 아무도 차마 소리 내 말하지 못하는 분노를. “나는 우리 힐빌리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지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머니를 모욕한 사람을 찾아가 전기톱을 들이대는 사람들이다. 또 우리는 여동생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여동생을 모욕한 놈의 입을 벌려 면 속옷을 욱여넣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우리는 브라이언 같은 아이들을 돕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만큼 강한가? 나 같은 아이들이 세상을 등지기보다 맞서 일어서도록 힘을 실어줄 교회를 세울 만큼 강한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고 우리가 아이들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을 일삼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할 만큼 강한가? 공공 정책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줄 정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밴스는 이렇게 처절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어른이 되었으며, 돌아가신 할머니와의 추억은 마치 밤하늘을 수놓은 별자리처럼 그의 인생을 밝혀준다.

문학은 내게 일깨워준다. 자꾸만 첫 마음을 잊어버릴 때마다. 자꾸만 일상의 괴로움 속으로 숨고 싶을 때마다. 문학은 내게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문장을 통해 일깨워준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내 모습이 아무리 늙거나 변해버리더라도, 내 무너져가는 존재 뒤편으로 숨어 있는 ‘나의 첫 모습’을 기억해주는 사람. 그가 바로 우리가 영원히 사랑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나도, 나의 나다움을 알아주는 사람을 향한 사랑을 일깨워주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의 힘임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문학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너는 아마 실패할 거야’라는 내 안의 목소리와 싸울 수 있는 힘을. 끝내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 대한 멈출 수 없는 갈망. 나의 나다움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 내 안의 가장 아픈 그림자와 내 안의 가장 눈부신 빛을 동시에 알아주는 존재를 향한 멈출 수 없는 갈망. 그것이 사랑임을. 문학은 일상 속에서 미처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의 뒤틀린 마음, 겹겹이 숨겨진 복잡한 속내를 등장인물의 온갖 고뇌가 담긴 독백을 통해 들려준다. 당신이 차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것들, 당신이 미처 표현하지 못한 분노 속에 당신의 진실이 있을 것이니.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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