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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물의 ‘얼굴’

등록 2021-02-19 05:00수정 2021-02-1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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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소파. 낡은 소파. 소파. 오래됨. 게티이미지뱅크
버려진 소파. 낡은 소파. 소파. 오래됨. 게티이미지뱅크

책&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

희음 지음/걷는사람(2020)

독일에서 고고학을 공부했던 허수경 시인이 고대 ‘사람들’의 자취를 찾아 나섰던 발굴지에서의 사유를 담은 글을 읽다가 다음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구석기니, 신석기니, 하는 시대를 정의하는 용어들은 그들이 쓰던 도구들이 그들보다 더 견고하다는 것만을 전해줄 뿐,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우리에게 찬찬히 들려주지 않는다. (…)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마치 처음 과음을 한 소년이 흐트러뜨리고 간 도서관의 책처럼 널려 있는 그 많은 토기와 토기 조각들. 아마도 음식을 담거나 음식을 끓이는 데 사용되었을 그 도구들은 온기를 잃고 연대를 매기는 후대인들의 손으로 들어간다.”(허수경,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난다, 2018, 76쪽) 시인은 옛 사람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옛 물건들을 겸손하게 맞이한다. 물건의 일부를 두고 그것을 사용한 이들의 삶이 어떻더라고 함부로 단정하는 기록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잘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만나기 위한 징검다리 같은 질문을 조심스레 적어두는 것이다. 한 시절의 온기가 다 식어버린 물건을 남기고 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하고.

숫자와 기록 사이로는 빠져나갈 수밖에 없을, 오직 살아 있는 순간에만 알아챌 수 있는 어떤 사람들의 팔딱거리는 ‘생애’를 그이들과 관계된 사물을 통해 환기할 때,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떠올릴 수 있다. 희음의 시가 특정한 사물로부터 누군가의 얼굴과 몸짓을 자꾸 불러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사물은 우리에게 그 사물을 사용한 사람이 누구인지 전부 (혹은 쉽게) 알려주려 하진 않지만, 사물의 내력이 그것을 사용한 이와 연결되지 않고서는 시작될 수 없다는 사실도 일러주는 것이다. 허름한 “소파 한 귀퉁이”, “세 발만 남은 식탁 의자”, “시소의 안장 한 끝”과 같이 오래 쓰인 만큼 저 자신의 역할도 무뎌진 사물들이 포개져 있는 검푸른 풍경 사이로 “그가 앉아 있”는 시를 읽는다.

“그가 앉아 있다// 3인용 가죽 소파 한 귀퉁이에/ 닳고 얼룩진 매트리스 위에/ 바람 부는 세 발만 남은 식탁 의자에/ 더럽혀진 2월의 눈밭 위에/ 쇠로 된 시소의 안장 한 끝에/ 어느 빌라 에어컨 실외기 위에/ 골목 어귀 콘크리트 계단 가운데/ 멋대로 웃자란 강아지풀을 뭉개고/ 엉망이 된 잔디의 검푸른 물 위에/ 나란한 두 개의 무덤 사이에/ 허기진 짐승의 늑골 곁에/ 말들이 끝나버린 입술 아래에/ 불가능한 사랑의 복숭아뼈 위에/ 그리고 다시 소파로/ 그는 돌아와 앉아 있다/ 슬픔이라곤 처음인 손님의 얼굴로// 얼굴이 소파 속으로 꺼져 있다/ 얼굴을 머금고/ 소파가 앉아 있다”(희음, ‘앉아 있는 사람’ 전문)

닳고 얼룩이 들고 더럽혀지고 뭉개지는 방식으로 흐른 시간들을 여기에 두고 어디론가 가버린 그 얼굴에 대해 시인이 “그가 앉아 있다”고 적을 때, “소파”는 “얼굴을 머금”은 “앉아 있는 사람”이 된다. 사물들이 놓인 그 자리에 알지 못하는 사람의 생애가 있다는 것, 이곳에선 당장은 (혹은 쉽게는) 잘 들리지 않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저곳에선 그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알지 못하는 것 앞에서는 자연스레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것을, 시인에게서 배웠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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