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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흑인 여성의 ‘있는 그대로의 세계’

등록 2021-03-05 04:59수정 2021-03-05 10:14

백인 중심으로 이상화된 페미니즘이 소외시키는 많은 여성들
더 많은 여성들이 목소리 내고 생존할 수 있도록 ‘우리’ 넓혀야
미국 흑인여성들이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참여한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미국 흑인여성들이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참여한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든 여성은 같은 투쟁을 하지 않는다: ‘모두’의 페미니즘에서 누락된 목소리

미키 켄들 지음, 이민경 옮김/서해문집·1만8000원

“나를 맞히지 않은 총알 역시 나를 바꾸어놓는다.” 총을 쏘는 이들에 저항하는 대신 안전한 곳으로 피하기, 총을 (대신) 맞는 사람들을 숭배하거나 낙인찍기, 총구 이편의 사람들을 분리해 때로는 총구를 쥔 사람과 한편에서 공모하기. 그 상황에 노출되면 총알에 맞지 않는다 해도 사람은 바뀔 수밖에 없으며, 자신이 지닌 분노의 에너지는 그로부터 비롯한다고, 미키 켄들은 말한다. 교차성, 치안, 젠더, 성폭력 등 현재적인 사건에 관심을 갖고 말하는 페미니스트 미키 켄들은 “학계 바깥에서 페미니즘을 배운” 생애 궤적을 따라 흑인 여성이 처한 현실과 주류 페미니즘이 놓친 것들에 대해 <모든 여성은 같은 투쟁을 하지 않는다>를 썼다.

총기를 언급한다고 해서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군에서 복무한 미키 켄들은 흑인 여성으로서 폭력에 노출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총구는 누구를 향하는가’에서, 미국 사회의 총기 문제와 흑인 여성이 겪는 폭력 이슈를 연계해, 총기 폭력을 페미니즘 이슈로 다루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미키 켄들은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페미니즘이 총과 무슨 상관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당신이 상관없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의 삶에서 총기 문제가 페미니즘 이슈가 아닐 뿐이라고. 흑인 여성들의 삶에서 경찰이 가하는 폭력, 특히 경찰이 권력을 남용해 휘두르는 폭력은 자주 생명을, 생존을 가르는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미키 켄들은 <모든 여성은 같은 투쟁을 하지 않는다>를 통해 ‘저 사람’이 겪는 일이라고 선을 그어 구분짓는 일이 무용하고, 섣불리 연대자의 위치에서 내려다보려 하지 말라고 단언한다. 적절히 대응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신을 맞히지 않은 총알 역시 당신을 (높은 확률로 나쁜 쪽으로) 바꿀 테니까.

미키 켄들은 굶주림, 주거, 교육, 의료, 총기 문제까지, 전부 페미니즘이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인종과 계급에 따라 장애물은 다른 양상으로 등장하며, 따라서 우선 과제도 저마다 다르다. <모든 여성은 같은 투쟁을 하지 않는다>는 백인 여성이 중심인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이자, 흑인 여성의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고 있다. 후자를 말하기 위해 전자가 분노의 목소리로 언급된다. 예를 들어 백인 페미니즘이 다이어트와 다이어트 강박을 말할 때 저소득층 흑인 여성들의 현실은 굶주림을 해결하는 데 집중된다. 백인 페미니즘이 대학의 강간문화와 가정폭력의 심각성에 주안점을 둘 때, 흑인 여성들은 가정폭력에 더해 경찰폭력으로 인한 생존을 고민해야 한다.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COO) 셰릴 샌드버그가 ‘린 인’(lean in)이라는 표현을 쓰며 더 적극적으로 기회를 받아들여 높은 자리까지 승진하라고 여성들을 독려할 때, 흑인 여성들이 이름 때문에 고용차별을 겪고 헤어스타일 때문에 해고당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다루어지지 못했다. 페미니즘이라는 사회운동의 역사와 주요 인물들이 백인 여성으로 표상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다.

미키 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드’(hood)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는 흔히 뒷골목에 대한 은유로 쓰이는 ‘후드’를, 흑인이 밀집되어 있고 빈곤층 비율이 높은 지역에서 성장하며 형성한 자신의 관점을 미국 중산층 백인 중심의 페미니즘과 대비해 서술해 사용하고 있다. “중산층, 백인, 이성애자, 날씬한 몸, 비장애인 등 인공적인 ‘규범’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이에게 통용되는 진실”을 인지하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개입해야 한다고. “세상에 바라는 대로 개입하는 방식”은 가장 많은 특권을 가진 이들의 관심에 주목하는 이상화된 페미니즘을 만들어내고, 필연적으로 많은 여성을 소외시킨다는 것이다. 착하고, 사교적이고, 참을성 있는 방식을 가진 페미니스트들이 대화에 실패할 때 미키 켄들은 자신이 거친 말을 사용해 사람들을 흔들어놓는다고 말한다. 가장 급진적인 목소리를 들으면 백인 남성 중심의 사회는 그제야 이전에 실패한 (온건한 페미니스트와의) 대화를 이어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모든 여성은 같은 투쟁을 하지 않는다>는 흑인여성 혐오를 당사자성에 입각해 이야기한다. 연대자가 되는 대신, 구원자를 자처하는 대신 자원을 나누는 데 더 신경쓰라고 말한다. 분명한 사실은, “여성과 소녀들이 (남성과 소년들이 갖는) 기회를 동등하게 갖고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평등한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페미니즘의 목표는 인종을 불문하고 같다는 것이다. “우리 공동체를 분열하는 것은 가부장제다.” 다만 저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고, 백인이 연대자를 자처한다고 해서 다른 인종, 다른 계급으로 인한 문제를 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을 대신해 말할 권리는 없다는 선언이다. 방조된 인종주의는 동맹이 되어야 할 여성들을 공모자로 만드니까. “너무나 많은 페미니즘 텍스트들이 나 같은 소녀에 대해 쓰면서도 나 같은 소녀들에 의해서 쓰이지는 않았다”라는 책 속 문장은 그래서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흑인 여성을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치부하는 대신 그들의 요구를 권리를 가진 사람의 말로 들으라는 주장이 이 책에 담겼다.

흑인 페미니즘에 대한 책이 한국에서도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종 다양성이 부재한 곳에서는 계급이 중심을 차지할 수 있다.” 결혼과 노동을 위해 한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라는 개념을 더 넓게 가져야 하는 이유다. 더 많은 여성이 목소리를 내고 자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즉, 책 속에서 백인 남성이 점하는 위치를 한국 사회에서는 한국 남성이 점하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을 읽는 한국 여성 독자가 처한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흑인 여성의 페미니즘 저작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오드리 로드의 <시스터 아웃사이더>, 트레시 맥밀런 코텀의 <시크>, 패트리샤 힐 콜린스의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함께 읽기를 권한다.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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