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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내 마지막 책은 자네가 내주게”

등록 2021-03-12 04:59

[책&생각] 책이 내게로 왔다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1·2·3

이이화 지음/교유서가(2020)

“혼자 맥주 마시며 자축하고 있는데 눈물이 다 나네. 마무리 잘 지어주소. 책 나오면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축배를 들었으면 좋겠그마.”

2019년 7월9일 자정을 막 지나는 시각에 이이화 선생께서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의 최종 원고와 함께 보내온 이메일 전문이다. 4개월 뒤 선생이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는 연락을 받았고, 다시 4개월 뒤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4개월 뒤에 선생의 유작인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전3권)를 출간했다.

조선말 민초들의 혁명사를 다룬 이 책의 집필을 앞두고, 이이화 선생은 여생의 숙제인 듯이 이렇게 말씀하곤 했다. “이제는 다른 책을 쓸 힘도 시간도 없네. 다만 꼭 하나 쓰고 싶은 것이 있어. ‘동학농민혁명사’야. 어려운 한자어를 줄이고 쉬운 우리말로 쓸 거야. 출판사 운영에 지장이 없다면 자네가 내줘.”

선생께서 계시던 파주 헤이리와 출판사가 그리 멀지 않아서 가끔 함께 식사했다. 반주를 곁들이는 날에는 “맥주 딱 한 병만 더”를 무한 반복하는데, 어느새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난다. 특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현실 정치 이야기를 하시다가 마지막에는 늘 책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셨다. 기승전‘출판’. 출판업자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어느 날부턴가 자리의 마지막 말씀은 늘 ‘동학농민혁명사’였다.

선생과 함께하며 놀란 점이 여럿 있는데, 무엇보다 여든의 연세에도 젊은 편집자 이상으로 텍스트를 꼼꼼하게 살피고 읽었다. 한번은 어떤 책 교정지를 저물녘에 전해드렸는데, 다음 날 아침 9시에 전화를 했다. “다 봤으니 가져가라”고. 500쪽이 넘는데 밤새 다 보셨다는 건가? 이미 나온 적이 있던 책이니 대충 보신 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찾아뵈었는데 교정지가 빨간 사인펜 수정자로 물들어 있었다. 편집자가 통일해 두었던 한양과 한성, 주자학과 성리학을 문맥에 따라 구분하라는 등의 체크가 많았다. 혹시나 회사로 돌아와 수정 작업을 할 때 선생께서 체크한 의도를 놓칠 수 있어 그 자리에서 교정지를 펼쳐보며 눈에 띄는 몇 군데를 여쭈었는데, 손 돋보기로 들여다보며 해당 대목을 다시 짚고는 차근차근 설명해주셨다. 댁을 나서면서 든 생각은, 선생께서는 앞으로 한 권이 아니라 열 권도 족히 더 쓰실 수 있겠는걸….

선생이 지난해 봄에 대뜸 답사하러 가자고 연락을 했다. 아침 일찍 선생과 함께 전북 고창과 정읍의 동학 전적지를 누비며 넘실거리는 청보리 바람을 맞았다. 젊은 시절, 맨땅에서 동학 관련 자료들을 찾아 정리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이 책 제3권의 원고에는 동학 기념사업에 참여했던 분들의 성함이 단순하게 나열되는 대목이 제법 보여서 좀 조정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병원에 입원 중이신데다 코로나로 외부인 출입이 금지돼 말씀드릴 길이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도 당신의 연구에 관심을 보였고 당신께서 주도한 행사에 함께해준 고마운 마음들을 기록해두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교유서가는 이이화 선생과 무척 연이 깊다. 선생의 첫 책 <허균의 생각>과 마지막 책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를 냈다. 허균의 호 교산과 정약용의 당호 여유당에서 한 글자씩 집자해 출판사 이름을 지어주신 분도 선생이시다. 선생님, 고마웠습니다!

신정민 교유서가 대표

신정민 교유서가 대표. ⓒ박수민
신정민 교유서가 대표. ⓒ박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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