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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유전자 검사는 정말 자발적 선택일까

등록 2021-03-12 05:00수정 2021-03-12 10:49

강제 단종수술 대신한 산전 유전자 검사는 21세기 우생학
장애와 차이는 제거해야 할 대상 아니라 존중해야 하는 것
톰 셰익스피어
톰 셰익스피어

장애와 유전자 정치: 우생학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까지

앤 커·톰 셰익스피어 지음, 김도현 옮김/그린비·2만8000원

우생학은 역사책에나 나오는 과거의 유물일까? 영국의 사회과학자 앤 커와 톰 셰익스피어가 쓴 <장애와 유전자 정치>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이들은 우생학을 “재생산에서의 유전병의 제거가 강조되는, 그러나 제거의 수단은 다양할 수 있는 어떤 느슨한 개념”으로 보고자 한다. 지금의 유전학 관련 정책들, 실천들, 전문가들, 임상유전학의 사회적 맥락은 얼마든지 우생학적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예전 우생학에 비해 오히려 더 교묘하고 광범위해졌으며 일상화되었다.

책은 먼저 20세기 초 영국과 미국에서 우생학이 등장하여 사회적 지지를 획득하고 제도와 실천으로 자리 잡는 과정, 나치의 인종학과 그 비인간적 실천, 그리고 북유럽 국가들의 우생학을 다룬다. 나치의 학살이라 하면 아우슈비츠와 유대인을 떠올리게 되지만 조현병, 우울증, 지적 장애, 왜소증, 마비, 뇌전증, 성적 도착, 알코올중독, 반사회적 행동 등을 이유로 1939년 말부터 1941년 8월까지 독일인 적어도 7만명이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야 강제적 단종수술을 완화하거나 없앴다. 강력한 복지국가를 추구하면서 과학과 진보와 효율성에 대한 신념을 지닌 이들 사회는, “결함을 지닌 유전자로부터 자유로운 건전하고 건강한 사람들을 우생학 프로그램을 통해 창조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기술을 통해 훨씬 더 확장된 능력을 갖춘 인류, 이른바 포스트휴먼에 대한 최근 논의를 떠올리게 만든다.

강제적 단종수술이 사라진 자리를 유전자 검사에 바탕을 둔 소비자의 ‘자율적 선택’, 예컨대 산전 선별 검사와 그 결과에 따른 의료적 조치들이 대신한다. 정말로 ‘자율적 선택’일까? 권력은 원치 않는 것을 하게 만드는 강제력이기도 하지만, “원하는 것 그 자체를 형성해내고 거기에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하도록 스스로 결정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권력 행사다. 오늘날의 우생학은 “개인의 선택을 가장하여 우리에게 다가올 수도 있으며, 그것은 질병의 제거뿐만 아니라 ‘유전학적 증강(향상)’도 포함될 수 있다.”

저자들은 “장애와 차이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라 본다. 장애의 주된 문제는 유전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며, 손상을 지닌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드는 환경적‧경제적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선별 검사 결과가 무엇이든 “사람들은 장애 아동을 갖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자원이 제공되어야만 한다.”

더구나 유전자 검사는 건강 및 질병과 관련하여 불확실한 정보 이상을 제시하지 못한다. 어떤 질병이나 행동에 대한 소인을 지녔다고 진단하는 것은, 그 질병과 행동의 발현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유전자 검사 시장을 키우기 위해 그 검증력과 유의미성을 과장하는 것이 상업적 이해관계와 맞물려 지속되고 있다.”

저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국가가 시장과 결탁해 전체 인구를 상품화하는 것”이다. 공익으로 간주되는 것을 위해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인구의 유전자(DNA)를 국가 자원화하고 나아가 상품화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국가는 “유전 정보의 오용을 예방할 엄격한 법률 도입은 피하면서, 게놈학 분야를 규제하는 데 불충분한 특허 관련 법률에 의지한다.” 궁금해진다.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기대를 모으며 국가적 지원을 받는 우리의 ‘K(케이)-바이오’, ‘K-재생의료’, ‘K-의료’의 현재 또는 장래에는 이러한 문제가 없을까?

이에 대해 저자들은 관련 정책 입안에 대한 시민 참여가 좀 더 일관되고, 비판적이며, 상호적인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회적 이슈들을 숙고할 수 있도록 하는 공공의 장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것. 이 점에서 저자들은 이른바 ‘숙의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유력하게 여기는 것 같다. 결국 문제는 정치다. “게놈학은 지구적이고 지역적인 수준 양쪽에서 민주적 수단을 통한 모니터링과 통제가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생학은 지구적 차원에서 다시 한 번 번성하게 될 것이다.”

대안은 있을까? 과학자들에게 고도의 전문성을 갖췄다는 이유로 백지 위임장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시민들이 유전자 및 재생산 기술을 사유하고 그 기술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고려할 수 있도록 문화적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 유전 경향을 갖는 연골무형성증으로 인해 왜소증을 지닌 장애인 당사자이자 장애운동가, 바로 저자 가운데 톰 셰익스피어(사진)가 뉴캐슬대학교 생명센터에서 진행한 ‘정책·윤리·생명과학 프로젝트’가 하나의 사례다.

진화심리학의 강력한 호소력과 그 유행에 관한 저자들의 평가가 흥미롭다. 우리나라에도 책이 번역되어 잘 알려져 있는 스티븐 핑커, 맷 리들리 등에 대해 저자들은 이렇게 지적한다. “구조와 사회경제적 특징보다는 개인과 생물학적 특징에 초점을 맞춘 그들의 설명은 신자유주의 정치사상 및 새로운 개인주의와 잘 조화를 이루었다.” 대체로 보수는 사회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진보는 자연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으로 보려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면, 저자들은 보수화 흐름과 생물학적 요인의 강조 흐름이 궤를 같이한다고 보는 셈이다.

현실 비판적 관점을 지키면서 통념을 뒤흔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 자체가 하나의 실천이며, 이 책을 읽는다는 것도 그러하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은 김호연의 <유전의 정치학, 우생학>(단비·2020), 염운옥의 <낙인찍힌 몸>(돌베개·2019), 그리고 이 책을 옮긴 김도현의 <장애학의 도전>(오월의봄·2019)이다. 토마스 렘케의 <생명정치란 무엇인가>(심성보 옮김, 그린비·2015)는 이 주제에 대한 철학적‧이론적 관심을 심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사진 라이트 포 더 월드(Light for the World)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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