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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호메로스가 인공지능을 상상했다?

등록 2021-03-19 04:59수정 2021-03-19 09:27

르네상스 ‘몸의 발견’이 고대의 상상을 오늘날 현실로
AI·성형수술 등 통해 몸 재발견하는 물질인문학 기획

인공지능과 흙

김동훈 지음/민음사·1만8000원

한 장 한 장 벽돌 쌓아 올리듯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 읽어야 할 책이 있다. 이 책은 그렇지 않다. 각각 독립적 에세이라고 해도 좋을 30개 장을 목차 순서와 상관없이 비선형적, 무작위적으로 읽어도 좋다. 그렇게 읽다가 독자 나름의 어떤 통찰이 떠오를 수 있는 책, 요컨대 지적 탐험을 이끄는 책이다. 그 탐험을 위해 저자가 설정한 최소한의 시간 지도는 ‘르네상스-상상과 현실의 시대’. ‘고대-상상의 시대’, ‘근현대-현실의 시대’다.

그러니까 책의 핵심 말은 상상과 현실이다. “고대의 상상과 근현대의 현실은 그 자체로만 볼 때 괴리가 큰 듯하지만, 르네상스를 거치게 되면 상상력이 현실에 적응되고 융합되는 하나의 모델을 보게 된다.” 바꿔 말하면 고대, 르네상스, 근대는 그 시간적 차이와 무관하게 이것저것이 뒤섞여 착종(錯綜)돼 있다. 책은 그 착종의 모양새를 보여준다. 서양 고전학자인 저자는 예컨대 인공지능의 상상력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18권 ‘황금비서’에서 찾는다.

“그러자 황금으로 만든 비서들이 주인을 부축해 주었다. 이들은 살아 있는 소녀들과 똑같아 보였는데 감정을 지닌 지능, 음성, 힘이 장착되었으며 불멸의 신들에게 작품도 배워 알고 있었다.” 이 구절에서 저자는 오늘날의 인공지능 스피커, 인공지능의 학습 기능, 감정 인식 등의 실마리를 찾는다. 저자가 ‘감정’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프렌(phren)의 원래 뜻은 횡격막인데, 고대 그리스인들은 횡격막에 오늘날 우리가 감성, 성벽, 기질로 여긴 것들이 자리하고 있다고 여겼다는 것.

저자는 나아가 지금의 인공지능이 의식인공지능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묻는다. 에스에프(SF) 영화 <엑스 마키나>(2015)에서는 인공지능이 의식을 탑재하여 의식인공지능이 되자, 그것은 자신을 만든 인간을 가두거나 죽이고 기계로부터 탈출해버린다. “의식기계를 만들었다면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신의 역사죠.” 영화 대사의 한 구절이다. 책은 이렇게 고전, 신화, 대중문화, 철학, 예술, 과학기술, 사회 등을 종횡으로 엮어가며 독자들이 생각해볼 만한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에서 저자는, 주인공 과학자가 묘지에 버려진 시체들 중 최상의 부위들을 모아 꿰매어 만든 괴물이 결국은 인간들에게 배척당하고 만다는 점을 눈여겨본다. 괴물의 육체는 인체의 조각들로 이뤄졌지만 인간들은 괴물의 육체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육체를 규정하는 자들의 권력이 드러난다. 권력은 금기를 만드는 자들이 갖고 있다. 시대를 지배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차원의 온갖 권력은 육체에 틀을 지운다.”

그렇다면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규정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인공심장, 인공관절 등 각종 인공물을 지닌 인간이 늘어나고 그 인공물의 기능도 고도화되면서 인간의 신체가 새롭게 규정되는 중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시대는 과거 괴물로 치부하던 또 다른 육체를 발견하면서 열릴 것이다.” 무척이나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책이지만 저자는 인간의 신체, 육체성, 물질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안드로이드, 사이보그, 로봇, 인체도, 좀비 서사, 성형수술 등등.

성형수술에 대해 저자는 단지 얼굴을 예쁘게 꾸미는 미용이 아니라 육체의 이상적 형상을 재창조하는 재건이 먼저라고 본, 16세기 의사이자 해부학자 탈리아코치의 주장에 주목한다. 탈리아코치는 <이식재건성형론>에서 성형을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영혼을 회복하여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15세기 사상가 피코 델라 미란돌라에게 영향받은 것이기도 하다.

미란돌라는 <인간의 위대함에 관한 연설>(1486)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담아, 우리는 네게 어떤 자리도, 고유한 얼굴도 특별한 선물도 주지 않았으니, 네가 원하는 자리와 얼굴과 선물을 너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소유하게 함이라. 그것은 네 존재를 마음껏 자발적으로 바꾸고 구성할 수 있는 네가, 형상을 원하는 대로 온전히 만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 이렇게 성형의 맥락을 자신이 원하는 형상대로 자율적으로 변신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자기 신체와 삶의 자율적 기획에 가깝다.

메리 셸리의 소설 &lt;프랑켄슈타인&gt;의 1831년 판본에 실린 삽화. 민음사 제공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1831년 판본에 실린 삽화. 민음사 제공

죽은 자로 취급된 오이디푸스가 다시 나타나고 테베에 전염병이 만연했다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의 묘사를 저자는 좀비 서사로 읽어낸다. 현대의 좀비는 “육체를 갖고 있지만 주체성을 빼앗긴 채 수동성에 잠식되어 기계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다. 좀비 게임이나 영화는 왜 유행할까? 일과 삶이 디지털 세계의 가상화로 치우쳐버린 현실에서 물질적 육체성과 감각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꿈틀대며 움직이는 좀비를 현실적 육체성의 화신으로 불러낸다. 인간이 수동적 ‘노예 좀비’가 되고 좀비가 오히려 육체성의 화신이 되는 아이러니다.

저자가 육체성에 주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인간의 신체를 물질로 받아들이고 신체와 감각의 복권에 주목하는 물질인문학”을 기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인문학은 정신이나 관념에 치우친 인간성이 아니라 자기 몸을 일상에서 재발견하고자 한다. 흑사병을 겪고 인간 회복에 역점을 둔 르네상스인들을 “몸을 발견한 사람들”이라고 보면, 코로나19를 겪는 우리에게도 그런 발견이 절실하다는 것.

책 제목의 ‘흙’은 물질성, 육체성, 감각, 현실 등을 대표하는 말이자 “나는 흙”이라는 겸허한 자각이며 이를 통해 세계와의 어울림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바탕이다. 저자 스스로 밝히듯 물질인문학의 구체적 실천 방안은 아직 부족하다. 저자의 향후 작업이 기대된다. 30편으로 구성된 고품질 지식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읽어나가면 꽤 즐거운 책읽기가 될 수 있다. 책에 담긴 지식도 지식이지만 사람과 세상을 보는 시각을 새롭게 자극한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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