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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윤은로의 방납

등록 2021-03-26 04:59수정 2021-03-26 10:06

[책&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조선시대 이조참판(吏曹參判)이면 어느 정도 힘이 있을까? 참판은 판서 다음이니, 요즘으로 치자면 차관이다. 당연히 힘 있는 자리다. 또 이조는 모든 문관의 인사를 관장하는 부서니, 이조의 참판은 권력 중의 권력이다. 여기에 더하여 참판이 왕의 처남이라면 어떨까? 이조참판 윤은로(尹殷老)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윤호(尹壕)였고 누이는 성종의 계비(繼妃) 정현왕후였다.

1490년 5월 윤은로는 방납(防納)을 한 죄로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는다. 방납은 공물을 대신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조선의 세금은 땅을 경작하여 그 수확물 중 일부를 바치는 전세(田稅), 노동력을 바치는 신역(身役), 각 지방에 배당된 특산물을 바치는 공물(貢物)로 대별할 수 있다. 이 중 가장 무겁고 가혹한 것이 공물이었다. 자기 지방에서 나지도 않은 것이 배정된 경우가 허다했다. 수확량이 줄어들어도 역시 예전과 같은 양을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좋은 품질의 것을 바쳐도 품질이 좋지 않다 하여 퇴짜를 놓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원래 배정한 양보다 더 많은 양을 강요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전세와 신역은 때에 따라 깎아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공물은 그런 법도 없었으니, 공물로 인한 백성의 고통은 이루 다 말로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뒷날 대동법이 나온 이유다.

변수가 많은 곳에는 부정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공물을 대납하는 자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대납해 주는 대신 원래 값의 몇 배를 받기 시작했다. 멀쩡한 현물을 바치려 해도 바치지 못하게 막고 대신 납부하고 돈을 뜯어갔다. 납부하는 것을 막는다고 하여 방납(防納)이다. 당연히 권력 있는 자가 눈감아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행위였다.

방납의 주체는 각 관청의 아전과 노비, 시정의 상인들이었다. 조정은 당연히 이들의 불법 행위를 적발하고 처벌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이조의 참판이나 되는 사람이, 그것도 왕의 처남이나 되는 사람이 재물을 탐내어 방납을 했다니,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하지만 윤은로가 방납에 깊이 개입했던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의금부의 조사에 의하면, 윤은로는 서흥부사·신천군수·문화현감·토산현감에게 3차례 편지를 보내어 장사치 신말동에게 방납을 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지방관은 당연히 권세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신말동이 방납으로 큰 이익을 보고, 윤은로가 신말동으로부터 뇌물을 챙긴 것은 불문가지다.

윤은로의 죄는 장(杖) 80대를 벌금으로 대신하고 품계를 3등급 강등하는 것이었다. 실제 집행된 것은 장 80대를 대신하는 벌금뿐이었다. 부자로 소문난 윤은로에게 그 벌금쯤이야 푼돈이었을 것이다. 이조참판이 아니었다면, 왕의 처남이 아니었다면 윤은로가 처벌을 면할 수 있었을까?

지금 세상에도 윤은로는 흔하디흔하다. 고위관직에 있으면서 자기 땅값을 올려 돈을 쓸어 모으고, 보통 국민들이 꿈도 꾸지 못할 고급 아파트를 주워 담는 자들이 있다. 우리 사회가 정색을 하고 이들을 처벌한 적이 있었던가? 처벌 받지 않는 권력의 카르텔은 여전히 쌩쌩하다. 이 카르텔을 해체하지 않으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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