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 키우기
한승원 지음/문학동네·2만2000원
원로 작가 한승원(82)이 소설가로 살아온 일생을 정리한 자서전 <산돌 키우기>를 펴냈다. 어머니가 꾸었던 태몽에서 시작해 고향 장흥에 내려가 자연과 벗하며 유유자적하는 이즈음까지 80년 남짓한 세월을 본문만 500쪽에 육박하는 분량에 살뜰하게 채워 넣었다. 작가 자신은 “아마도 나의 마지막 진술이 될지도 모르는” 책이라고 서문에 썼다.
자서전 초반부에서 인상적인 것은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들려주는 숱한 이야기들이다. 행동거지 느린 괴짜 선비, 여의주를 삼킨 소년, 괴물과 금덩이, 두꺼비와 토끼의 내기, 귀신과 동침한 과거꾼, 간사한 여우 같은 이야기들과 토끼전, 심청전, 춘향전, 삼국지며 도깨비 이야기 등은 어린 한승원에게 사람됨의 도리와 세계의 이치를 알려주는 지침 구실을 했다. “어린 시절에 동화 한 편 읽지 않았지만 시인 소설가가 된 것은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많은 이야기들” 덕분이었노라고 한승원은 회고한다.
서당 훈장 노릇을 하며 마을 사람들의 토정비결과 사주를 보아주고, 벗들과 어울려 풍월을 읊거나 이야기를 만들고 들려주기를 즐겼던 ‘비현실적인’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생활력이 강하고 현실적인 편이었다. 장남을 편역들고 차남인 자신을 차별하는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가며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이어 대학까지 진학한 작가의 뚝심과 의지가 지금의 한승원을 있게 한 원천이었음을 책을 읽으면 알게 된다.
작가가 소년기에 겪은 여순사건과 6·25 전쟁은 그 스스로 “보수도 진보도 아니고 순수 쪽도 참여 쪽도 아니”라고 설명하는 중도적 세계관 및 문학관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당시 상대적으로 유복했던 집안 형편 때문에 어린 한승원은 철없는 또래들로부터 ‘반동자’ 자식이라며 따돌림을 당하지만, 전쟁 뒤 읍내의 중학교에 다니며 자취할 때에는 점심 도시락도 못 싸 가는 가난뱅이 신세를 면치 못한다. 중학교 3학년 초에 김을 팔아 가까스로 등록금을 마련한 어머니가 시장 안 팥죽집에서 팥죽 한 그릇을 시켜서 아들만 먹이고는 자신은 빈 속으로 봄눈이 휘날리는 시오리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한승원과 같은 장흥 출신인 이청준의 단편 ‘눈길’을 떠오르게도 한다.
자서전 <산돌 키우기>를 낸 작가 한승원. “돌이켜보면 내 삶의 에너지는 이야기였다”며 “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지나 온 삶의 과정에서 깨달은 것들을 유언하는 심정으로 쓴 것이 이번 책”이라고 <한겨레>와 전화 인터뷰에서 말했다. 문학동네 제공
실제로 ‘눈길’의 모자가 걸었던 길 역시 책에는 나온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집에서 농사를 짓고 김 양식을 하면서 독학으로 작가가 되겠다는 계획을 세운 지은이가 양계를 겸하기로 하고 씨암탉을 사러 갔던 산골길이 바로 “내 동갑내기 소설가 이청준의 ‘눈길’에서 그들 모자가 걸어간 길”이라고 작가는 각주에서 밝힌다.
낮에는 농사와 김 양식, 양계 등으로 집안 경제를 돕고 저녁에는 책을 읽고 글을 써서 작가가 되려던 꿈은 거듭된 낙방으로 결국 물거품이 되고, 그 과정에서 실망한 첫사랑 역시 자신을 떠나가자 작가는 아버지가 논 두 마지기를 팔아 만든 학비를 들고 서울로 올라간다. 그렇게 입학한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서 그는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의 강의를 듣고, 이문구와 박상륭 같은 동기들도 만난다. 그의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목선’은 3년 동안 김 양식을 한 경험을 살린 작품이었다.
등단 뒤 시류를 좇아 군사독재정권의 엄혹한 통치를 풍자한 작품을 즐겨 쓰던 그에게 어느 날 이문구가 쓴소리를 했다. “너는 왜 서울 것들 흉내를 내는 거야? 너한테는 바다가 있지 않니? 니 ‘목선’ 같은 소설을 써라. 다른 친구들은 바다 이야기를 쓰고 싶어도 몰라서 못 쓴다.” 소설집 <안개바다> <폐촌> <포구의 달> 등과 장편 <해일> <해산 가는 길> <멍텅구리배> 등을 통해 그가 한국 문학사상 독보적인 해양 작가 반열에 오른 데에는 친구 이문구의 조언이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아기는 얼굴이 예쁘장한데, 피부가 약간 가무잡잡했고 이국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1970년 광주의 기찻길 옆 작은 시멘트 블록 움막집에서 태어난 딸 한강에 관한 묘사다. 한강 위로는 오빠가 한 명 있고 그 오빠 이전에 먼저 생겼던 아기가 있었지만 미숙아로 태어난 그 아기는 몇 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아내는 아기의 두 팔을 배 위에 나란히 올리고 하얀 천으로 둘러 감고, 머리에 앙증스러운 하얀 모자를 씌웠고, 어머니는 그 주검을 질그릇 동이에다가 넣고, 뚜껑을 덮었다.” 한강의 <흰>은 이 일을 중심으로 짜인 작품이다. 어린 시절 고명딸 한강은 공상을 즐기는 아이였다. 저물녘에 모습이 보이지 않아 불안스레 찾게 만들었던 딸이 어두운 제 방에 가만히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너 거기서 뭐하고 있니?”라고 아버지가 묻자 어린 한강은 이렇게 대답한다. “공상이요! 왜요, 공상하면 안 돼요?” 한강은 아버지의 자서전 말미에 붙인 발문에서 이렇게 썼다. “고백하자면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어떤 경우에도 문학을 삶 앞에 두지 않겠다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반짝이는 석영 같은 이 페이지들 사이를 서성이고 미끄러지며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얼마나 척박한 흙을 밀고 그가 기어이 꽃피었는지. 그걸 가능하게 한 글쓰기가 그의 종교였음을.”
자서전 말미에서 작가는 “요즘 나는 딸의 권유로 자연친화적인 작가나 시인들의 책을 읽는다”며 북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작가 로빈 월 키머러의 <이끼와 함께>와 <향모를 땋으며>,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과 <긴 호흡> 등을 거론한다. 작가는 24일 <한겨레>와 전화 인터뷰에서도 “여기 와 살면서는 딸의 조언을 많이 듣는다”며 “자연을 오염시키지 않고 자연과 함께하는 자연친화적 삶으로 인류가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그 책들을 읽으면서 더더욱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나온 삶의 굽이굽이에 떨어져 있는 금싸라기 같은 이야기들을 시 같기도 소설 같기도 에세이 같기도 한 잠언투에 담는, 삶의 이삭줍기 같은 글을 다음 책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