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홍순철의 이래서 베스트셀러

박완서 지음/세계사·1만6000원 “제 글은 사실 그리 대단하지 않아요. 아마 대단하지 않아서 독자분들이 제 글을 좋아해 주는 것 같아요.” 박완서 작가는 2006년 한 서점에서 진행한 <그 남자네 집> 낭독회 자리에서 자신의 글이 인기 있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 자리에 진행자로 앉아 있었던 터라 박완서 작가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단하지 않아서’라는 표현을 썼던 게 또렷이 기억난다. 실제로 그의 글감은 우리 주변의 소박하고 대단하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의 글은 마치 나의 이야기 내 이웃의 이야기처럼 빨려들게 하는 ‘대단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고 박완서 작가 10주기를 맞아 서점가에는 작가의 작품세계와 삶을 재조명하는 책들의 출간이 이어지고 있다. 헌정 개정판, 특별판, 결정판 등 독자들의 시선을 끌 만한 수식어가 붙은 책들이다. 주요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는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는 박완서 작가가 1970년부터 2010년까지 쓴 660여 편의 에세이 가운데 대표작 35편을 추린 책이다. 1970년 마흔 살 늦깎이로 등단한 때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영원한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해온 작가의 고단하면서도 행복했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다. 분명 어디선가 읽었던 글이었을 텐데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40년 전, 30년 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전혀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박완서 작가를 추모하는 기성세대 독자들은 물론이고 옛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젊은 세대 독자들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야기보따리다. “그럼 진짜 보통 사람은 어디 있는 것일까? (…) ‘크게는 안 바라요. 그저 보통 사람이면 돼요.’ 가장 겸손한 척 가장 욕심 없는 척 이렇게 말했지만 실은 얼마나 큰 욕심을 부렸었는지 모른다. 욕심 안 부린다는 말처럼 앙큼한 위선은 없다는 것도 내 경험으로 알 것 같다. 아마 나의 가장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까다로운 조건만 내세워 자식들의 배우자를 골랐더라면 생전 시집 장가 못 보냈을지도 모른다.” 자식의 배우자를 고르면서 ‘보통 사람’을 찾았던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는 글을 읽으며,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위선과 오만을 마주하게 된다. 부끄러움이 자취를 감춘 시대를 깨우는 죽비소리다. ‘사랑의 입김’이란 에세이를 읽으면 입김에 대한 추억이 모락모락 솟아난다. “‘호오, 호오’ 어린 마음에 할머니나 어머니의 입김이 와 닿기는 비단 다쳐서 아파할 때만이 아니었다. 화롯불에 파묻어 말랑말랑 익힌 감자나 밤을 꺼내 껍질을 벗겨주시면서도 ‘호오, 호오’ 입김을 불어 알맞게 식혀주셨다. 먹고 싶은 걸 참느라 침을 꼴깍 삼키면서 그분들의 입을 지켜보면서 어린 마음속엔 그분들에 대한 신뢰감이 싹텄었다.” 입김에 서린 사랑과 평화,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따뜻한 글이다. 소박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삶의 지혜는 박완서 작가의 책에 자꾸만 손이 가게 하는 이유다. 평범해 보이는 단어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서 일상이라는 천을 짜내는데, 완성된 천의 모양이 짜임새 있고 곱다. 무심한 듯 편안하게 써 내려 간 글인 것 같은데, 한 편의 글을 읽고 나면 엄마가 차려준 든든한 밥 한 끼를 먹은 기분이다. 담백하면서도 건강한 글맛이란 게 뭔지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문장들, 이게 바로 ‘한국문학의 어머니’ 박완서 작가의 힘이다. BC에이전시 대표, 북칼럼니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