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비용
데버라 리비 지음, 이예원 옮김/플레이타임·1만4000원
<살림 비용>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극작가이자 시인인 데버라 리비의 ‘자전적 에세이 3부작’ 중 두 번째 책이다. 비소설로 분류되는 에세이가 자전적 성격이 강한 일은 흔하지만, 데버라 리비의 <알고 싶지 않은 것들>과 <살림 비용>은 삶의 특정 국면을 기록하기 위해 거의 시간 순서를 흩뜨리지 않고 써내려간 회고록 성격의 책들이다. 회고록이지만 삶 전체를 돌아보는 구성은 아니다. 데버라 리비의 에세이 3부작은 ‘생활 자서전’(living autobiography)이라고 불리는데, <알고 싶지 않은 것들>과 <살림 비용> 두 권이 2020년 메디치상 해외 문학 부문에서 수상했다. 올해 출간될 3부작 마지막 책의 가제는 <부동산>이다.
지난 2010년 카탈루냐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ANIMAC)에 참여한 데버라 리비(오른쪽). ⓒ Carlos Cazurro
“오슨 웰스가 일러 주었듯 해피 엔딩인지 아닌지는 어디서 이야기를 끊느냐에 달려 있다.” <살림 비용>의 첫 문장은 이 책의 저자가, 그리고 누구나의 삶이 처한 당연한 처지를 생각하게 한다. 죽기 전까지 삶은 이어지기 마련이라 어느 입장에서 보는지에 따라 그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지고, 어디에서 이야기를 끊는지에 따라 행복한 이야기였다가 그렇지 않은 이야기였다가 한다. 데버라 리비가 휴양지에서 들른 바 옆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보자. 중년 남자가 젊은 여성과 동석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남자가 떠들다가 곧이어 여자가 말을 시작했다. 여자는 스쿠버 다이빙을 갔다가 잠영 중에 폭풍을 맞닥뜨렸다. 여자는 보트로 돌아가야 했고, 보트에는 자신을 구하러 와야 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모든 일이 여의치 않았다. 폭풍은 여자가 자신의 삶이 처한 어려움을 우회적으로 언급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데버라 리비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운을 떼는 방식이다. 남자는 합석을 제안함으로써 나름의 모험을 감수한 셈이었지만, 여자가 스스로를 조연으로 치부해 가면서까지 남자인 그를 주연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몰랐음이 분명하다. 물론, 잠깐의 대화로 타인의 속마음은 알 수 없지만 글을 쓰는 데버라 리비의 생각만큼은 보인다. 데버라 리비는 자신이 낳은 두 아이의 아버지와 막 헤어졌다.
<살림 비용>은 결혼과 이혼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전남편’이라는 단어 대신 기껏해야 두 아이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뿐이다. 연인과의 결합에 대한 상념이라면 시몬 드 보부아르와 그의 연인 넬슨 올그런이 언급되는 대목도 빼놓을 수 없다. 올그런은 보부아르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나만의 주거 공간과 그곳에서 나와 함께 지낼 나만의 여자, 그리고 어쩌면 나만의 아이까지도. 이런 걸 바라는 게 유별난 건 아니지.” 하지만 그 유별나지 않은 것들을 얻기 위해 보부아르가 치러야 할 대가가 올그런이 치러야 할 대가 보다 컸다. 사랑 이야기는 어디에서 끊어야 해피 엔딩이 되는가. 보부아르는 올그런 대신 글을 쓰는 자신의 커리어를 선택했다.
<살림 비용>은 스스로를 부양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자신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책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와이프’로 불리는 순간들에는 많은 것이 달랐다. 문제는 사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예컨대 남자 상사를 둔 여자들이 회의실과 침실을 모두 아우르는 차림을 하도록 요구받는 기업 문화 속 여성성도 포함한다. 상사를 위해 성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항시 ‘대기’ 모드로 있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그런 유의 여성성은 시간을 잘 이겨 내지 못한다. 오래지 않아 시간이 입힌 때가 보이기 시작하기 마련이다.”
<살림 비용>은 세심하게 조율되어 있다. 주의할 점은 순차적으로 천천히 읽어야 진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책 초반에 언급된, 데버라 리비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의 바다 폭풍 에피소드는 여러 장면으로 쪼개져 다시 언급되곤 한다. 연결되어 흐르는 전개 때문에 마치 파도치듯 몇 번이고 반복해 인물과 사건이 조금씩 다른 국면을 드러내며 심상을 구체화시킨다. 삶이 전면적으로 붕괴하는 가운데 새로운 구성을 전망케 하는 거의 모든 요소가 다 담겨 있다. 버지니아 울프나 에밀리 디킨슨을 언급한다는 사실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최근 출간된 여성 작가의 에세이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고유명사가 이 둘이다), 인용 이후 질문을 심화시키는 방식에는 데버라 리비 특유의 인장이 있다. 차분하고 통렬하다.
데버라 리비의 에세이 3부작 중 첫 번째 책인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은 ‘작가의 탄생’을 다루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영국으로 이주했으며 결국 작가가 된 한 여자의 어린 시절부터의 성장기 말이다. <살림 비용>에도 같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특히 어머니. <살림 비용>에서, 어머니는 암 투병 중에 돌아가셨다. “이리도 모순되고 사회의 가장 강력한 독기를 머금은 잉크로 쓴 메시지를 어머니가 용케 견뎌 내는 게 가히 기적이다. 그러니 이성을 잃지 않을 수가 있나.” 이러한 통찰은 그 자신이 이제 어머니가 된 데버라 리비 자신을 향해 있다.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하고서야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는 자신의 마음도 있다. “어머니는 말 잘 듣는 딸이 되라는 요구에서 그치지 않고 나를 많이 다그쳤지만, 나 역시도 어머니가 당신 본연의 모습(그게 더 낫건 아니건 간에)에 충실하길 원하지 않았다는 걸 이제는 알겠다.” 그런데 <살림 비용>에서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해 가장 충격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말기 암으로 심한 고통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핥아서야 겨우 먹을 수 있던 특정한 아이스크림에 대한 에피소드 전체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암 이야기였다가, 아이스크림 이야기였다가, 동네 가게 사람들 이야기였다가, 데버라 리비 자신의 이야기였다가 하는 식으로 쓸쓸하지만 외롭지만은 않은 기억의 소용돌이가 점점 크게 만들어진다.
<살림 비용>은 계속되는 삶을 위해 쓰였다. 헤어진 남편도 이제 중요하지 않고, 전망은 언제나 미래에 속해 있다. <살림 비용>이 지닌 기묘할 정도의 차분함은 그래서 가능하다. 엔딩은 한 번뿐이며, 나빠 보인 것들도 과정에 있을 뿐이다. 자신의 시선과 언어를 갖고 세상을 조망하는 사람은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