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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비서 로봇은 꼭 여성이어야 할까?

등록 2021-04-02 05:00수정 2021-04-02 10:30

[책&생각] 임소연의 여성, 과학과 만나다
⑪ 로봇과 여성
여성 로봇은 고정관념 강화하나 남성 로봇은 전문성 강조돼
편견 기댄 익숙한 로봇보다 고정관념 깨는 낯선 도전 늘어야
2015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화성에 보낼 목적으로 제작한 우주 탐사 로봇 발키리. 공식적으로는 성별이 없지만 이 로봇을 고안한 미국 로봇공학자 니콜라우스 래드퍼드는 7살짜리 딸을 위해 이 “강인하고 실용적인 여성 로봇”을 만들었다고 했다. 가슴 부위에 13㎏가량의 부피가 큰 배터리가 들어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누리집
2015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화성에 보낼 목적으로 제작한 우주 탐사 로봇 발키리. 공식적으로는 성별이 없지만 이 로봇을 고안한 미국 로봇공학자 니콜라우스 래드퍼드는 7살짜리 딸을 위해 이 “강인하고 실용적인 여성 로봇”을 만들었다고 했다. 가슴 부위에 13㎏가량의 부피가 큰 배터리가 들어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누리집

인간은 오랫동안 인간을 닮은 기계를 꿈꿔왔다. 중세 시대 이래로 자동인형이라고 불리는 여러 움직이는 인형이 있었고 20세기 초에는 실제 로봇보다 먼저 ‘로봇’이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로봇에 대한 인간의 상상은 컴퓨터 기술의 발전과 함께 실현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산업용 로봇은 20세기 중반에 개발됐는데, 당시 산업 현장에 도입된 많은 로봇은 인간의 외형 전부를 닮기보다 인간의 손과 팔을 대신한 형태에 불과했다.

로봇이 인간의 모습을 닮기 시작한 것은 로봇이 일상적인 장소로 들어오면서부터다. 인간에게 맞춰진 공간에서 인간의 일을 대신하거나 인간과 가깝게 교류하며 일을 돕기 위해 로봇은 인간과 비슷해져야 했다. 이처럼 인간을 닮은 로봇은 여성을 닮기도 하고 남성을 닮기도 했다.

여성 로봇과 남성 로봇은 다르게 만들어진다

에버와 휴보라고 불리는 두 로봇을 보자. 에버는 2003년 한국생산기술연구원에서 개발한 국내 최초의 인간을 닮은 로봇이다. 박물관이나 백화점에서 방문객을 안내하거나 어린이를 교육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듬해 한국과학기술원에서 개발된 로봇 휴보는 뛰어난 신체 조작 및 이동 능력으로 사람을 대신해 사고나 재난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재난 로봇으로 설계됐다.

에버는 여성을 닮았다. 키 160㎝, 몸무게 50㎏인 체형에 얼굴은 유명 여자 연예인 두명의 얼굴을 합성한 모습이다. 실리콘 소재의 피부에 머리는 길고 치마 정장이나 원피스를 즐겨 입는다. 에버의 기능은 상반신과 얼굴에 집중돼 있다. 얇은 팔과 작은 얼굴을 구현하기 위해 초소형 모터와 제어기가 사용됐고 특히 얼굴 부위에 배치된 15개의 모터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쓰였다. 이러한 외형과 기술은 ‘젊고 날씬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특성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이 로봇은 세계 최초의 연예인 로봇으로서 공연 무대에 서기도 했다.

반면 휴보는 기계의 느낌이 더 강하다. 금속 재질로 이뤄진 몸체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휴보는 개발 초기에는 그 체형이 120㎝, 40~50㎏ 정도였지만 최근 버전은 250㎝, 280㎏에 이를 정도로 커졌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사고 현장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카메라와 센서가 달려 있다. 여성을 닮은 에버와 달리 휴보는 얼굴 생김새나 머리 길이, 옷 등으로 성별 특성을 드러내지 않으나 남성 인칭 대명사로 지칭된다. 하얗게 센 곱슬머리를 한 세계적인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얼굴 모형이 부착돼 ‘알베르트 휴보’로 불리기도 했다.

(위)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소속 사회적 로봇공학자 신시아 브리질과 그 동료들이 설계한 사회적 로봇 실험의 한 장면. 동일한 로봇이 각각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로 참가자에게 기부를 독려하는 실험에서 여성 참가자들은 로봇의 성에 따른 기부금 차이를 거의 나타내지 않은 반면, 남성 참가자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한 로봇에게 더 많은 돈을 기부하는 경향을 보였다. 2009년 IEEE/RSJ 지능형 로봇 및 시스템 국제 학술대회 발표 자료. (아래) 무대에서 공연 중인 에버(왼쪽)와 아인슈타인의 얼굴 모형을 부착한 ‘알베르트 휴보’.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웹진 누리집, 위키피디아
(위)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소속 사회적 로봇공학자 신시아 브리질과 그 동료들이 설계한 사회적 로봇 실험의 한 장면. 동일한 로봇이 각각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로 참가자에게 기부를 독려하는 실험에서 여성 참가자들은 로봇의 성에 따른 기부금 차이를 거의 나타내지 않은 반면, 남성 참가자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한 로봇에게 더 많은 돈을 기부하는 경향을 보였다. 2009년 IEEE/RSJ 지능형 로봇 및 시스템 국제 학술대회 발표 자료. (아래) 무대에서 공연 중인 에버(왼쪽)와 아인슈타인의 얼굴 모형을 부착한 ‘알베르트 휴보’.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웹진 누리집, 위키피디아

안내하는 일은 여성 로봇에게 더 적합하다?

에버와 휴보의 사례에서 짐작할 수 있듯, 로봇의 외형은 로봇이 수행하는 일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여성을 닮은 에버의 외형은 방문객들에게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고 어린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에버의 임무와 무관하지 않다. 애플의 시리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코타나, 아마존의 알렉사 등 개인 비서 인공지능 프로그램들 역시 처음에는 여성의 목소리로만 출시되었다.

여성으로 인식되는 로봇에게 주어진 안내, 교육, 돌봄, 가사, 반려 등의 임무는 사회적으로 흔히 여성이 하는 일이라 여겨지는 업무 유형에 속한다. 인간을 대신해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나 고도의 계산 작업을 수행하는 로봇이 아닌 인간과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교감하는 ‘사회적 로봇’이 하는 일과도 겹친다. 소셜 로봇이라고도 불리는 사회적 로봇은 인간 사용자의 의도나 감정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에 적합한 행위를 학습, 판단해 사용자에게 최적화된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회적 로봇의 임무에 인간과의 상호작용은 필수적이므로, 이를 만드는 로봇공학자 또한 인간과 로봇이 자연스럽게 교감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중요시한다. 일본의 로봇을 연구한 제니퍼 로버트슨 전 미국 미시간대학교 인류학과 교수는 로봇공학자들이 인간과 로봇의 상호작용을 촉진하고자 여성과 남성에 대한 성 역할 고정관념에 근거해 로봇에 성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로봇 상호작용 분야의 많은 연구가 보인바 사람들은 여성 로봇이 남성 로봇에 비해 더 협조적이라고 느끼며, 성 역할 고정관념에 따라 여성의 일은 여성 로봇이 해야 더 적절하다고 인식한다. 그리고 로봇공학자들은 굴곡 있는 몸체, 긴 머리, 전형적인 여성의 이름이나 목소리 등 간단한 특징만으로 로봇을 여성으로 만들 수 있다. 여성 비서 로봇은 비서 로봇을 만드는 가장 안전하고 손쉬운 전략을 취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여성 비서 로봇은 성 고정관념에 도전하지 않는다

문제는 여성 비서 로봇과 같이 성 고정관념을 따르는 로봇이 실제 여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영국 드몽포트대학에서 로봇과 인공지능의 문화·윤리를 연구하는 캐슬린 리처드슨 교수는 여성 로봇이 여성의 일을 대신해 여성을 해방하기보다는 여성에 대한 기대와 성 고정관념을 더욱 강화한다고 본다.

여성 로봇은 대체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이고 성애화된 젊은 여성을 모델로 한다. 에버는 여성스럽고 단정한 외모로 방문객이나 어린이들을 맞이하며, 그들에게 항상 친절하고 상냥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돼 있다. 이는 사실상 여성이 이미 오랫동안 강요받아온 기대다. 현실의 여성들이 이러한 기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싸우며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것과 달리 여성 로봇은 설계된 그대로의 고정관념을 수행하며 여성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를 현실로 만든다. 여성 비서 로봇은 그 자체로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의 증거이자 그것을 더욱 강화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성 고정관념을 따르는 것은 남성 로봇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결과는 다르다. 휴보에는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남성이 해야 한다는 성 고정관념이 반영되나 애초에 인간 남성과 동일시할 만한 외형을 가지고 있지 않고 성별이 강조되지도 않는다. 남성 로봇이 주로 수행하는 재난 구조와 같은 임무는 그 전문성이 훨씬 강조된다. 휴보 역시 2015년 세계 재난 로봇 대회에서 1위를 한 것으로 주목을 받았다. 성 고정관념은 현실의 여성과 남성에게 그러하듯 여성 로봇과 남성 로봇에게도 비대칭적으로 적용된다.

성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로봇공학을 기대하며

성 고정관념에 기반한 로봇은 로봇공학적 관점에서도 재고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여성 비서 로봇이 남성 비서 로봇보다 선호되는 이유는 협조적인 태도와 소통 능력 등 비서 업무에 요구되는 특성이 주로 여성에게 특화된 능력이라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고정관념이 작동한다. 하나는 특정 성격이 비서 업무에 더 적합하다는 성격 고정관념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에게 주로 그런 특성이 있다는 성 고정관념이다.

2014년 국제 학술지 <인간 행동과 컴퓨터>에 실린 한 논문은 이 두 고정관념이 인간-로봇 상호작용에 미치는 영향을 보고자 싱가포르 남녀 대학생 164명을 대상으로 로봇 실험을 진행했다. 첫번째 실험에서는 성 고정관념의 영향을 평가하기 위한 요소로 외양이 똑같은 보안 로봇과 돌봄 로봇에 전형적인 남녀의 이름과 목소리를 줬다. 두번째 실험에서는 성격 고정관념의 평가 요소로 로봇들에게 각기 다른 성격 특성을 부여했다. 가령 외향적 성격이 부여된 로봇은 목소리가 더 크고 높으며 말하는 속도가 빠르게 설정됐다.

실험 결과, 참가자들은 보안 로봇으로 남성형 로봇이거나 내향적 성격인 로봇을, 돌봄 로봇으로 여성형 로봇이거나 외향적 성격인 로봇을 선호했다. 로봇 공학의 기존 전제를 재확인시켜주는 결과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두 실험을 비교했을 때 참가자들은 성 고정관념보다는 성격 고정관념에 맞는 로봇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는 성 고정관념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한 로봇보다 임무 수행에 더 적합한 자질을 구현한 로봇이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더 잘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결과다.

비서 로봇을 언제나 밝고 상냥한 젊은 여성으로 만드는 로봇공학은 사회에 해로울 뿐 아니라 공학적으로 흥미롭지 않다. 이미 많은 로봇공학자가 ‘인간을 대신하는 기계는 인간을 닮아야 한다’는 가장 오래된 고정관념을 깨고 인간에게 필요한 기능에 최적화한 새로운 형태의 로봇을 만들고 있다. 낡은 성 고정관념에 기댄 익숙한 로봇을 만들기보다 익숙한 성 고정관념을 바꾸는 낯선 로봇에 도전하는 로봇공학자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숙명여자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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