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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가슴 설레는 물음, 존재의 형이상학을 향하여

등록 2021-04-30 05:00수정 2021-04-30 09:27

토마스 아퀴나스 사상의 정수, 순수존재에 대한 통찰 담은 저작
가독성·정확성 획기적 진전…역자 공력 드러낸 풍성한 후주 주목

존재자와 본질

토마스 아퀴나스 지음, 박승찬 옮김/길·3만5000원

중세 스콜라 철학의 대표자 토마스 아퀴나스(1224/1225?~1274)의 신 존재 증명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신 존재에 대한 그의 난해한 논변들도 증명이지만, 그가 남긴 천문학적 분량의 저작 자체가 곧 신 존재 증명이라는 농담이 있다.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신학대전>을 비롯해 <대(對)이교도대전>, <명제집주해> 같은 대표작은 물론이고, 각종 토론문제집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주해서도 규모가 방대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이는 그만큼 ‘토미즘’(아퀴나스에 의해 세워진 철학·신학 체계)이 ‘정복하기 불가능한 산’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표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혹시라도 그 많은 저술 활동 중에 자기 사상의 정수를 간명하게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저작을 남기지는 않았을까? 이번에 새로 번역 출간된 <존재자와 본질>(De ente et essentia)이 반갑게도 그런 저작에 속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 저작은 전 세계 대학에서 토미즘 입문용으로 가장 많이 강독되는 텍스트일 것이다. 그러나 보기보다 상당히 난해하고, 또한 압축적인 만큼 호흡이 빠른 텍스트여서, 여간한 인내와 상세한 안내 없이는 제대로 소화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토마스는 이 책을 30살 무렵 파리대학에서 강사를 할 때 자신이 생활하던 생 자크 수도원의 동료 수사들을 위해 썼다. 당시 정돈되지 않고 사용되던 형이상학 용어에 혼란을 느끼던 연학(硏學) 수사들이 학문적으로 출중했던 토마스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이고, 토마스는 동료들의 요청에 응해 이 책들을 저술했을 것이다. 그런데 토마스는 <존재자와 본질>을 저술하면서 단순히 교과서적 용어 정리에 그치지 않고, 후세 사람들에게 토미즘이라는 명칭으로 기억될 자기 사상의 독창적 핵심을 강단 있게 표출한다. 그 핵심은 대략 다음과 같다. 존재라는 것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현실화하는 힘이라는 것. 그리고 그 힘은, 그 힘이 없어도 무엇인가가 이미 있었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우연적으로 작용하는 힘’이 결코 아니라는 것. 결정적으로, 유한한 존재자들의 존재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본질에 다름 아닌 어떤 힘으로, 즉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어떤 순수하고 완전한 존재로 소급된다는 것. 

카를로 크리벨리의 그림 &lt;성 토마스 아퀴나스&gt;(1476년). 토마스 아퀴나스가 수사들의 형이상학 공부를 돕기 위해 쓴 &lt;존재자와 본질&gt;은 아퀴나스 사상을 비교적 간명하게 접할 수 있는 텍스트로 꼽힌다. 런던 국립미술관 누리집
카를로 크리벨리의 그림 <성 토마스 아퀴나스>(1476년). 토마스 아퀴나스가 수사들의 형이상학 공부를 돕기 위해 쓴 <존재자와 본질>은 아퀴나스 사상을 비교적 간명하게 접할 수 있는 텍스트로 꼽힌다. 런던 국립미술관 누리집

이 핵심을 보여주기 위해 토마스는 존재자와 본질이라는 명칭의 의미를 세밀하게 분류하고 설명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유, 종, 종차 같은 논리학의 개념과, 우유, 실체, 형상, 질료 같은 존재론의 개념을 철저히 분석하고 적용한다. 이러한 설명을 거쳐 3장에서 토마스는 개별적 복합 실체 안에서 본질 개념이 이해되는 여러 방식들을 분류해 놓는데, 이는 본질 개념을 명백히 해놓아야 본질과 존재의 관계 규정에 따를 수 있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할 수 있다는 일종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질료와 형상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복합 실체의 경우든, 형상으로만 이루어진 단순 실체의 경우든, 본질(무엇임, essentia)은 존재(있음, esse)와 합성되어 존재자(있는 것, ens)가 된다. 비유하자면, 본질이란 사물의 규정성이라서 빛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고 존재란 그릇에 담기는 빛 같은 것인데, 토마스의 특유한 관점은 말하자면 ‘본질이라는 그릇’이 존재의 빛 없이는 애초에 ‘아직 실재할 수 없는’ 일종의 가능성일 뿐이라는 것이다. 토마스는 이 점에서, 존재와 결합하기 위해서 본질이 그 자체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저 위대한 아랍 철학자 아비첸나(980/987?~1037)와 다른 길을 갔을 뿐 아니라, 자신이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동시대의 쟁쟁한 철학자였던 시제 브라방(1235/1240?~1281/1284?) 역시 존재와 본질의 관계에 대한 토마스의 해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토로하고 있으니, 오늘날 우리가 찬탄하는 토미즘의 존재의 형이상학이 적어도 당대부터 주류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존재와 본질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근거로 토마스는 곧바로 형이상학의 근본적 토대로 육박해 들어간다.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본질과 다른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타자로부터 가져야 한다는 이론이 여기서 성립한다. 우리가 감각적으로 그리고 사고 상으로 경험하는 유한한 존재자들의 ‘공통존재’와 구별되는, 있음 자체가 곧 자신의 본질인 순수 존재의 발견, 이 명료한 철학적 발견이야말로 <존재자와 본질>이 도달하는 절정부다. 이 책은 신이 왜 존재하는지를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신이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는지는 분명하게 설명해준다. 그렇기에 이 책은 고전적 의미의 신 존재 증명 텍스트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철학적 신론의 기초가 담긴 텍스트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책은 이미 두 차례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도서출판 길에서 나온 번역본이 가독성과 정확성에서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본문 번역의 분량을 훨씬 넘어서는 상세한 후주다. 짧은 본문 각주로 소화하기 힘든 긴 호흡의 배경 지식 설명을 여러 후주로 달아놓았는데, 후주에 또 각주가 달려 있을 정도니 입문자뿐 아니라 전공자에게도 별도의 소논문을 읽는 것 같은 즐거움을 준다. 원전을 정밀하게 장악하고 연구사를 세심하게 검토한 역자의 공력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과문한 식견이지만, 주해의 함량은 이 한국어 번역본이 전세계 어느 번역서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것이라 감히 추측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며, 존재하는 것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가? 실로 가슴 뛰는 질문이지 않은가? 철학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철학사에 토미즘이 끼친 심대한 영향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책 <존재자와 본질>을 지나쳐서는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저 엄청난 질문을 던지며 조금이라도 가슴이 설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집어 들고 읽어볼 일이다. 아니 무엇보다, 토마스의 이 책이 그런 설렘을 깨우칠 것이다.

김율 대구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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