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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노’라는 말을 들어라

등록 2021-05-28 04:59수정 2021-05-28 15:05

왜곡된 성문화에 대한 십대 여성 글, 전문가 분석 실어
성적 객체화 맞서려면 “몸과 마음 분리된 활동해선 안 돼”

아이 세이 노!: 여자 사람의 외침

케이티 카피엘로·메그 맥어너니 지음, 허소용 옮김/상상파워·1만5000원

2021년 아카데미 각본상은 <프라미싱 영 우먼> 각본을 쓰고 연출한 에머럴드 피넬이 받았다. 이 영화는 7년 전 친구가 강간당한 사건이 철저히 묻힌 데 복수하려는 주인공 커샌드라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제목의 ‘프라미싱 영 우먼’은 성폭력 가해자들이 법정에서 ‘전도유망한 청년’임을 호소해 낮은 형을 받는 것에 빗대, 성폭력 피해자들이 ‘전도유망한 청년’이라는 사실에 눈감는 현실을 지적한다. 영화에서 강간 피해를 당한 여성은 의대생이었다. 하지만 가해자가 의대생이라는 사실이 피해자가 의대생이라는 사실보다 더 값어치 있게 다루어졌다. 피해자가 사건 당일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피해를 입증하고 그로부터 회복되기는커녕 나쁜 평판 속에 고통받았다. <아이 세이 노!>의 여러 이야기는 <프라미싱 영 우먼>과 겹쳐 보인다.

<아이 세이 노!>를 쓴 케이티 카피엘로와 메그 맥어너니는 배우처럼 연기 훈련을 하고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십대 여성을 위한 공간, 예리하고 진지하게 이슈에 접근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 극장을 만들고자 2007년 ‘아트이펙트 올 걸 시어터 컴퍼니’를 설립하고 창작 연극 <페이스북 미> <슬럿> 등을 창작하고 연출했다.

연극 <슬럿>의 시작은 2012년 1월 아트이펙트와 일주일에 한 번 뉴욕에서 모인 창작 세션이었다. 여고생 20명이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슬럿’(slut)이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었던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용어 정리를 따르면 ‘많은 남성과 성 관계를 갖는 여성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슬럿인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합의된 성관계든 성폭행이든 상관없이 본질적으로 소녀들은 늘 슬럿이 됐다.”

연극 <슬럿>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십대들, 나아가 성인들이 여성혐오, 슬럿 셰이밍(slut shaming, 성적 모욕,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모욕하고 강간과 성희롱을 정당화하는 데 쓰인다’)과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심화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래서 책의 원제는 <슬럿: 희곡>이고, 각본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자신이 경험한 왜곡된 성문화에 대한 십대 여성들의 글, 여성운동과 교육 등 전문가들의 기고, <슬럿>의 대본을 함께 실었다. 케이티 카피엘로는 <슬럿>을 바탕으로 넷플릭스 시리즈 <그랜드 아미>를 제작했고 각본에도 참여했다.

<아이 세이 노!>의 ‘파트1’에서는 십대가 자신의 직간접 경험을 들려준다. 제니퍼 바움가드너가 추천사에 자신의 언니가 십대 시절 겪은 일을 적은 것이 그 시작점이다. 바움가드너의 언니는 파티에서 난생 처음 술을 마시고 취해 강간을 당했다. 즉시 소문이 퍼졌다. 학교의 여자애들은 ‘슬럿’이라는 단어와 엮이지 않기 위해 그의 언니와 거리를 두었고, 남자애들은 호시탐탐 그를 노렸다. 그의 언니는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했고 지원한 대학에서 모두 합격 통지를 받았지만, 자신을 따라다녔던 ‘슬럿’이라는 오명은 내내 주홍글씨로 남아 있었다.

힙합을 좋아하는 오들리는 어느 날 제이 지의 노래를 듣다가 랩 내용이 끔찍할 정도로 여성혐오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뮤직비디오 속 여자들은 남성 래퍼의 배경으로, 과시할 용도의 물건으로 대상화될 뿐이었다. 소니아는 남자 친구의 생일에 뭘 사줄까 물어보았다가 “오럴 섹스”라는 답을 들었고, 클레어는 아파트 열쇠를 잊어 경비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그가 계단으로 데려가더니 가슴을 만졌다.

십대 여성의 피해에 대한 말하기 경험을 공유하는 데서 나아가 십대 남성이 경험하는 여성혐오적 문화에 대한 글도 함께 있다. 알레한드로는 아무리 ‘노’라고 말해도 거절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춤을 거절하는 것도 받아들일수 없다면 그보다 심각하고 은밀한 경우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맥스는 뉴욕에 있는 학교에서 존중과 동의를 가르치는 과목을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아 ‘저스트 히어 노’(Just Hear No, 그냥 노라는 말을 들어라) 청원을 시작했다.

전문가들의 기고는 미국의 교육 현장에서 성희롱과 성폭력에 대한 교육 개정안 적용 사례를 비롯해 성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를 다룬다. 1972년 제정된 교육 개정안 중 일부인 ‘타이틀9’는 2011년 4월부터 성희롱과 성폭력 또한 적용 범위로 두고 있다. 학교 쪽이 더 적극적으로 반응할 발판이 생겼다는 뜻이다. 또한, ‘슬럿’이라는 호칭이 여성혐오적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이 호칭을 사용하면서 그 비하적 의미를 퇴색시키고자 하려는 의도가 있다 해도, 그 단어 자체를 십대들의 일상에서 퇴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함께 실렸다. 미국 흑인 여성 성폭행 진실과 화해 위원회 의장인 파라 타니스는 미국의 흑인 여성들이 노예 제도를 바탕으로 한 이중의 억압에 놓여 있음을 지적하며 ‘슬럿’이라는 단어 사용의 부적절함을 논한다.

‘슬럿’이라는 욕설과 비하(이에 준하는 한국어 비속어는 너무 많다) 표현, 그로부터 파생하는 피해 경험에 대해 십대와 어떻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그것이 <아이 세이 노!>가 비단 각본을 싣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목소리와 가이드를 제시하는 이유다. 특히 ‘중재자’ 역할을 적극적으로 맡아야 할 이들에게 하는 조언이다. “중재 방법은 자신과 피해자 모두에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 필요하다.” 미디어에 비판적 태도를 갖기를 기본으로, 다른 사람이 못 본 척하는 이슈를 조명하기(“얘 많이 취했어. 어느 누구하고도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공개적으로 지목된 피해자를 도와줄 사람이 있음을 온오프라인에서 밝히기 등이 언급된다.

<아이 세이 노!>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들은 십대 여성들이 다른 곳도 아닌 학교에서 또래 남성들의 어떤 말에 노출되어 있는지, 싫다는 말이 어떻게 무시당하는지, 행동을 해도 하지 않아도 꼬리표가 따라붙는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지다. 성적 객체화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조언은 “결단코 몸과 마음이 분리된 활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이다. 당연해보이지만, 여성들에게는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쉬웠던 일이 없던 일.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연극 &lt;슬럿&gt;은 십대들, 나아가 성인들이 여성혐오와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심화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어진 작품이다. &lt;슬럿&gt;을 만든 케이티 카피엘로는 &lt;슬럿&gt;을 바탕으로 넷플릭스 시리즈 &lt;그랜드 아미&gt;를 제작했고 각본에도 참여했다. 사진은 &lt;그랜드 아미&gt;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연극 <슬럿>은 십대들, 나아가 성인들이 여성혐오와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심화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어진 작품이다. <슬럿>을 만든 케이티 카피엘로는 <슬럿>을 바탕으로 넷플릭스 시리즈 <그랜드 아미>를 제작했고 각본에도 참여했다. 사진은 <그랜드 아미>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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