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삐삐’ 작가의 강경한 태도

등록 2021-06-04 05:00수정 2021-06-04 09:44

[책&생각] 책이 내게로 왔다

폭력에 반대합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이유진 옮김/위고(2021)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라는 이름을 지운다면 지금의 어린이문학은 어쩔 수 없이 왜소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김이 빠질 것이다. ‘삐삐’라는 ‘말하고, 설치고, 생각하는’ 소녀도 없을 것이며, 그런 세상에서 아이들의 삶은 심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부재가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지금보다 더 폭력적인 세상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다.

40여년 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독일 출판서점협회 평화상을 수락하는 자리에서 아동에 대한 폭력을 반대하는 연설을 했고, 이 연설은 세계 최초로 스웨덴에서 아동 체벌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연설문이 바로 <폭력에 반대합니다>이다.

처음 번역 원고를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조금 당황했다. 연설문에서 어딘가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고, 매우 언짢아하는 감정이 느껴지는 것 아닌가.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원고라니…. 린드그렌이라면 폭력에 반대하는 연설 또한 온화한 그의 인품처럼 누구도 불편하지 않을 방식으로 전달했으리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 달리 그는 날이 서 있었다. 이유는 린드그렌의 연설문 뒤에 붙은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위원 토마스 함마르베리의 설명에서 알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폭력에 반대합니다>는 린드그렌이 1978년 독일 출판서점협회 평화상을 수락하며 발표하기로 한 연설문이었다. 그러나 연설문을 미리 받아본 주최 측은 ‘논쟁적인’ 그의 메시지에 곤란해하며 그저 “짧고 듣기 좋게” 수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린드그렌은 원안대로 연설하지 못한다면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주최 측이 할 수 없이 받아들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린드그렌은 정치적 이유로 폭력을 불사하면서 세계 평화를 쥐락펴락하는 정치계 고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그 시상식에서 그들의 면전에 대고 “오늘날 이 세상에는 (독재자, 폭군, 압제자, 고문 가해자 같은) ‘망쳐진 아이들’이 너무나 많”으며 “그들의 어린 시절에 회초리나 채찍을 휘두르는 폭군과 같은 양육자”는 없었는지 조사해봐야 한다고 일갈했다. 시상식의 분위기는 어땠을까. 아마 주최 측의 엉덩이가 끊임없이 들썩거렸을 테지.(<폭력에 반대합니다>를 만들면서 나는 린드그렌이 걸출한 동화작가에 머물지 않고 어린이, 여성, 동물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평생 살았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아가게 되었다.)

린드그렌이 강경한 태도를 고집한 것은 그에게 폭력이라는 문제가 너무도 거대하고 시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폭력에 대해서 근본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바로 아이들에 대한 폭력을 멈추는 일이었다. 린드그렌은 아동에 대한 폭력을 ‘체벌’(corporal punishment)이라든가 ‘아동 학대’(child abuse) 등으로 따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폭력’(violence)이라고 지칭할 뿐이었다. 그동안 훈육을 위해 자녀를 징계할 수 있다는, 사실상 가정 내 아동 폭력을 비호해온 이른바 ‘징계권’ 조항이 올해 1월 폐지되었다. 어린이에 대한 폭력이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미화될 수는 없음을, 의도와 맥락이 어떻든 폭력은 그저 폭력일 뿐임을 우리의 법이 이제 막 알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고백건대 이 책을 만들면서 나도 내가 저질러온 ‘폭력’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시작했다.

조소정 위고 대표

조소정 위고 대표. 본인 제공
조소정 위고 대표. 본인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